한국의 IT경쟁력이 작년 세계 8위에서 16위로 떨어졌단다. 이코노미스트인텔리전스유니트(EIU)가 세계 66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예상됐던 일이다. 정부에서는 조사의 신빙성을 들먹이며 반론을 펴겠지만 IT산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학계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구태여 변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순위가 밀린 부문을 보면 더더욱 짐작이 간다. IT산업환경이 28위다. IT발전을 위한 지원과 제도적 환경은 각각 28위와 33위로 전체 조사대상 국가의 중간 수준밖에는 되지 않는다.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항목들의 성적이 떨어진다는 점은 심각한 상황이다. IT산업을 진작시켜야 할 전담 정부부처의 신경은 온통 통방융합과 종합편성채널로 집중되어 있고 산업 측면에서의 IT는 일반 제조업보다 홀대 받는 현실이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일궈 놓은 IT강국의 성공신화가 흔들리고 있다. 당시를 IT버블이었다고 비판하지만 그 때는 벤처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성공을 향한 꿈과 열정이 있었다. 이제는 꿈과 열정마저 식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과거의 환상에 젖어 'IT강국'을 외치고 있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정부의 IT 산업정책은 실종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HW와 SW 산업이 모두 지경부로 넘어갔지만 IT 정책의 초점은 휴대폰 반도체 디스플레이에 맞춰진다. 서비스 부문은 방통위에서 주관하지만 SM이나 SI와 같은 IT서비스 영역은 안중에도 없다. 화두는 오로지 미디어와 IPTV다. 콘텐츠의 경우는 아직도 부처간에 다투는 소리만 들린다.

정부가 'IT강국'의 증거로 지난 수년 동안 국민들에게 홍보해 온 것이 IT 수출 동향이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IT수출 동향은 한국이 IT강국이나 아니냐의 문제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최근 3개월간 매달 IT수출액이 100억 달러를 넘었다. 무역수지 흑자는 그 절반인 50억 달러를 넘나든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IT기업들은 즐겁지 않다. 반도체와 휴대폰, 디스플레이 3개 품목이 전체 수출액의 73%를 넘고 있다. 여기에 컬러TV를 비롯한 가전제품과 삼성전자 홀로 생산하고 있는 HDD 프린터 등을 합치면 삼성전자 LG전자 팬택계열 등 극소수 대기업의 수출 점유율이 80%를 훌쩍 넘는다. 7~8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이다. 아니, 오히려 악화된 측면도 있다.

소프트웨어와 콘텐츠 수출은 올 들어 8월말까지 1.4억 달러다. 작년을 기준으로 할 때 연간 소프트웨어 수출액이 반도체 사흘치 수출물량에도 모자란다. 10 여 년 전부터 적극 육성한다던 방송장비는 어떤가. 8월 한달 동안 900만 달러 수출했고 연간 누적 8천만 달러에 불과하다.

이견은 있을 수 있다. 네이버가 있고 엔씨소프트가 있지 않냐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 말도 부분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독과점이라는 측면에서는 결국 부문별로 한두 업체가 시장을 고착화시킨 채 신규 진입장벽만 높인 모양새다. 대략 열 손가락에 꼽힐 이들 회사를 제외하면 한국에 IT 산업은 과연 있는가? 냉정하게 말하면 대기업의 잔치판에서 IT 중소 및 벤처 기업은 맥을 추지 못하는 불균형 구조이다. 통신장비의 거장 시스코가 버티고 있지만 끊임없이 네트워크 장비 벤처기업이 탄생하는 미국을 보면 우리는 변명할 말이 없다.

이번 EIU의 조사에서 러시아(38위) 중국(39위) 인도(44위)의 순위가 대폭 상승했다. 이들이 아직도 30위권 밖에 있다고 안심할 것인가. 일부 영역에서는 이미 우리를 앞서고 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일 때다. 이대로 몇 년 지나면 그나마 경쟁력 있는 IT자산마저 중고품이 되어 경쟁의 뒷자리로 밀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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