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 소설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백 조원을 쌓아두고 있다는 기업들이 10분의 1쯤만 꺼내어 일자리도 만들고, 내수도 진작시킨다면….

어른들치고 어릴 적에 '홍길동'이나 '일지매', 또는 '로빈후드'와 같은 의적소설을 한 권쯤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때 우리의 해맑은 동심은 악덕 부자들과 탐욕에 눈이 어두워 권세를 남용하는 고관대작들의 악행에 어찌할 바를 몰라 안타까움에 조막손을 부르르 떨곤 했었다. 또한 주인공이 끝까지 살아남아서 소설이 해피엔딩 하기를 바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모든 어린 독자들의 가슴 졸이는 소망이기도 했다.

소설 속 의적의 임무는 '부의 재분배'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는 모순된 사회구조를 깨부수는 것이 의적의 행동강령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작가는 실정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부의 쏠림을 허무맹랑한 무예실력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때문에 이른바 폭력을 사용하는 의적소설의 주인공들은 예나 지금이나 실정법 상 범죄자들이다. 그리고 소설의 줄거리는 동서고금에 걸쳐 늘 일어나는 현실이지만, 그러한 의적은 실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소설에나 있을 법한 허구의 인물일 뿐이다.

놀랍게도 최근 자본주의의 맹주인 미국이 '부의 분배'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 2월 26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부유층에게서 6,360억 달러의 세금을 더 걷어 중산층 이하를 돕는다'는 예산안을 발표한 것이다. 이에 미 언론은 이 정책의 핵심은 '부의 재분배'라고 규정하고, '계급전쟁'이 시작됐다느니, '로빈후드식 조세 정책'이라는 등 다양한 분석을 쏟아내고 있다.

오바마의 이번 정책이 과연 '계급전쟁'의 시도이고, '로빈후드'식 정책인 것일까? 한동안 이렇다 저렇다 하는 논란이 들끓을 것이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는 끝내 결론지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번 정책이 경기부양과 일자리 창출은 다급하고, 그 재원이 얼마나 들어갈 지 사실상 예측할 수 없는 비상국면에서 비롯된 일종의 고육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그 배경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이를 두고 '로빈후드'식 정책이라고 한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지독한 좌익법이자, 아마 최초로 자본주의 세계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의적법'이 나오는 셈이 될 것이다.

다시 회상컨대 우리는 어릴 적 의적소설을 읽고 주인공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은 실정법상 범죄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에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국민이 골고루 잘사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흐르고 있다. 그렇지만 대다수는 어쩔 수 없는 사회구조로 받아들이고 그저 부지런히 산다. 그래도 나이가 들수록 커져만 가는 이 두 감정의 간극은 숨길 수가 없다. 이러한 심정은 보수냐 진보냐를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하다못해 불현듯이라도 가슴을 치밀곤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맹주인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놀라운 신조류를 접하면서 꽁꽁 묶어 가슴 저 밑바닥에 억눌러 놨던 해묵은 고민이 새삼스럽게 일어나 가슴앓이를 일으킨다.

하지만 오바마 정책을 이념적 대결로 해석하기보다는 원초적 동심의 발상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 이유는 우리는 지금 100년 만의 글로벌 경제위기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내수진작과 일자리창출을 10년 전 금모으기처럼 범국민적 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하는데,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할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유치한 발상이지만 우리의 정권이 동심의 세계로 잠시만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 곳에 국민의 힘을 모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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