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IT 민간 기업이자 정보통신 발달사의 효시...‘끊임없는 노력과 변신으로 성장 발전’

KCC정보통신은 1967년 4월 설립됐으며, 국내 최초의 컴퓨터 기업으로 기록된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컴퓨터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정보통신산업 발달사의 효시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설립 당시 이 회사의 법인명은 '한국전자계산'이었는데, 이는 당시 생산성본부와 과학기술처 산하에 있던 한국전자계산소가 재단법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창립 40주년을 맞은 KCC정보통신 본사


한국전자계산은 컴퓨터에 대한 교육과 컴퓨터 시스템 도입, 그리고 업무개발 등 컴퓨터와 관련된 거의 모든 업무를 중심으로 기업 활동을 본격 시작했다. 이후 KCC정보통신은 1971년에 키펀치를 국내 처음으로 수출했고, 그 공로로 1974년 과학의 날에 상공부장관 표창을 받았고, 1976년에는 주민등록번호 전산화를 완성시키는가 하면 1982년에는 컴퓨터 및 주변기기 수출입 사업에 뛰어들어 레이저 프린터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생산을 하기도 했다. 주변기기 국내 생산과 수출로 인해 1987년과 1990년에는 동탑산업훈장을 각각 받기도 했다.

그러나 87년 노조가 설립되면서 인사 및 경영권을 둘러싼 갈등과 90년대 초에 불어 닥친 서버의 다운사이징화와 개방형 시스템 확산, 그리고 IMF로 인한 환차손 등으로 인해 경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과감한 구조조정과 무차입의 보수경영, 끊임없는 변신의 노력 등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켜 꿋꿋하게 성장 발전해 나왔다.

특히, 1993년 KCC정보통신 기획실장으로 부임한 이상현 현 사장은 이 회사의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소프트웨어 솔루션 및 서비스' 위주로 영업 전략을 전면 수정했고, 그 전략은 잘 맞아 떨어져 오늘의 KCC정보통신으로 성장 발전해 왔다.

이상현 사장은 창립 40주년 인사말에서 "끊임없는 노력과 변신으로 앞으로 40년, 더 나아가 400년까지 이어 나갈 수 있는 일류 장수 기업으로 성장 발전시켜 나갈 각오이다"고 밝혔다. 그의 부지런함과 보수경영, 끊임없는 노력은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게 주변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KCC정보통신의 희망과 꿈은 그렇게 멀지 않아 보인다. KCC정보통신이 어떻게 성장 발전해 왔는지 살펴본다.<편집자>

71년 2천만 원으로 KCC 창립
KCC정보통신은 지난 1967년 한국생산성본부 산하 (재)한국전자계산소로 설립됐다. (정식 법인 등록은 67년 4월) 한국전자계산소는 지난 1966년 생산성본부가 국내 처음으로 컴퓨터 시스템을 도입 검토하기 시작하면서 출발한다.



1967년 10월 국내 금융권 최초로 한국은행과 최초로 전산용역 계약 체결


당시 한국정부는 국내 산업의 정보화를 추진, 생산성본부에 정보화와 관련된 컴퓨터 시스템 도입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생산성본부 이은복 이사장은 컴퓨터 시스템 도입을 검토했으나 컴퓨터에 대한 기본적인 마인드가 잘 형성돼 있지 않아 美 IBM에 근무하고 있으면서 한국에서 잠시 휴가를 보내고 있던 KCC정보통신 설립자인 이주용 회장에게 컴퓨터 도입과 관련된 도움을 청한다.

KCC정보통신 이주용 회장은 국내 정보산업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포기하고 1년을 계약기간으로 생산성본부에 눌러 앉게 됐다. 이주용 회장은 컴퓨터 시스템 도입과 관련된 모든 계획안을 수립했으나 정작 이를 이해하고 사용할 만한 인재가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생산성본부 산하로 출발
이주용 회장은 인재양성을 위한 수단으로 67년 한국전자계산소를 설립하게 됐다. 이 때 이주용 회장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단국대 등 교육기관에도 강의를 나가기도 했다.

한국전자계산소는 67년 5월 과학기술처가 신설되면서 생산성본부에서 과기처 산하로 들어가게 돼 재단법인 한국전자계산소가 창립, 컴퓨터에 대한 교육과 컴퓨터 시스템 도입 그리고 업무개발 등 컴퓨터와 관련된 거의 모든 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한국전자계산소를 거친 인물들은 대부분 국내 정보산업계를 이끌어 온 거물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황칠봉 LG전자(당시 금성사) 전 사장을 비롯해 이성길, 김기수, 김주현 등을 들 수 있으나 이밖에 이름만 거론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인물들이 상당수 있다. 현직에서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는 인물들도 많다.

창립자 이주용 명예회장 회고록 헌정식



KCC정보통신은 지난 12일 창립 40주년 기념식을 갖는 자리에서 창립자 이주용 명예회장의 회고록 헌정식을 가졌다. 이 명예회장 내외와 이상현 사장.










재단법인인 한국전자계산소가 민간기업체인 주식회사 한국전자계산소로 탈바꿈하는 것은 지난 71년. 당시 한국정부는 경제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모든 산업을 해외수출에 중점을 두고 육성하는 단계에 있었다. 한국전자계산소는 이에 따라 수출을 위해 분주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첫 번째 수출 품목으로 '키펀치'를 선정, 이에 대한 수출을 시도했으나 공익단체인 재단법인은 수출을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주식회사인 한국전자계산(주)으로 변신하게 됐던 것이다.

'키펀치' 국내 첫 수출
한국전자계산은 이주용 회장이 600만 원, 김동수 전 수산청장이 100만 원, 이은복 전 생산성본부 이사장 200만 원 등 70여명이 각각 자본을 투자, 2,000만 원의 자본금과 250명의 인원으로 키펀치 수출을 비롯한 기업으로서의 영업활동을 본격 시작했다.

한국전자계산은 주로 컨설팅, 기기임대, 교육, 소프트웨어와 키펀치의 수출 등 컴퓨터와 관련된 사업을 국내 최초로 시작했고, 또한 기업으로서의 토대도 점차 마련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전자계산은 키펀치 수출을 비롯한 국내 정보산업의 토대를 마련했다는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74년 제 7회 과학의 날에 상공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주민등록 전산화로 사업기반 다져
한국전자계산은 이러한 배경으로 1976년부터 시작된 주민등록번호의 전산화 용역을 정부로부터 맡게 된다. 한국전자계산은 이 때 자사 처음으로 미니컴퓨터인 DATA-100 시스템과 18대의 터미널을 도입, 6개월 만에 주민등록번호의 전산화를 완성시킨다. 한국전자계산은 이를 계기로 DATA-100 시스템에 대한 국내 독점공급권을 따냈고, 정부로부터는 각 정부. 공공 기관의 컴퓨터 시스템 도입에 대한 우선판매권이라는 혜택을 얻어 사업기반을 완전히 마련했다.



1981년 10월 새마을호 승차권 전산발매시스템 가동식


한국전자계산은 당시 국방부, 철도청, 한국전력 등 굵직굵직한 정부・공공기관을 자사 고객으로 확보, 10억 원 이상의 매출실적을 올려 설립초기 매출액의 10배 이상 규모의 회사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어 1979년에는 자사의 주력 기종이었던 프라임 기종의 국내 독점공급을 시작, 무역협회를 비롯한 관세청 등 정부・공공기관에 10여대 이상을 공급, 20억 원 이상의 매출실적을 기록해 2년 전보다 2배 이상의 매출이 증가했다.

'레이저 프린터'도 국내 처음 생산
한국전자계산의 매출실적을 살펴보면 설립 첫 해인 67년에는 약 9,000만원, 72년 3억 2,000만원, 77년 10억 1,000만원, 82년 49억원, 83년 70억원, 87년 104억 6,200만원, 89년 117억 7,000만원, 90년 386억원, 92년 437억원, 97년 586억원 등 90년대 중반까지 줄곧 성장만을 거듭해 왔다.

이후 90년대 초 주력 기종인 프라임 서버의 단종으로 인해 주력사업의 변경과 1997년 이후 IMF 위기시의 환차손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KCC정보통신은 과감한 구조조정과 서비스 & 솔루션 위주의 영업전략 수정, 무차입의 보수경영,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과 변신으로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켜 국내 최초의 IT 민간 기업이라는 명성을 그대로 유지 발전해 오고 있다.

아무튼 한국전자계산은 지난 1981년 필동 사무소에서 현재 사옥이 들어서 있는 갈월동 본사 건물로 이전했다. 또 이 해 4월과 10월에는 각각 부산지사와 미국지사도 설립했다.

1982년에는 컴퓨터 및 주변기기 수출입과 발행업을 등록하게 되고, 프라임 컴퓨터의 주변기기 국산화를 추진하게 됐다. 한국전자계산은 지난 83년과 85년 각각 울산지사와 광주지사도 설립했고, 레이저 프린터의 국내 생산을 본격 시작하기도 했다.

동탑산업훈장도 두 번 받아
한국전자계산은 주변기기의 국내 생산과 수출로 인해 87년과 90년에 각각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한편, 한국전자계산은 매년 성장함에 따라 지난 85년에는 이윤배당제를 도입, 연말에 수 천 만 원 상당의 보너스를 각 사원들에게 지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KCC정보통신은 이렇게 순탄한 길만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지난 87년 국내 전 산업 분야에 노사분규가 일어날 당시 KCC정보통신에도 노조가 설립됐다. 노조 결성과 노사위기로 말미암아 이주용 사장이 회장으로 물러나게 되고 KCC정보통신은 연말 인센티브 배당과 인사권을 둘러싸고 상당기간 노사 간의 대립과 마찰로 영업에 상당한 타격을 받기도 했다. 결국 1989년에 이르러 노조가 해산하면서 정상화가 되었다.

다운사이징화로 한파
KCC정보통신은 또 지난 90년 이 회사에 18년 동안 근무했고, 이주용 회장의 후임자로 까지 물망에 올랐던 계열사인 선진시스템 성기철 사장(전 시스폴 대표이사)이 돌연 사표를 제출, 또 한 번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마침 이주용 회장에 이어 대표이사를 맡고 있던 강원윤 사장마저 병환으로 근무가 어려워져 부회장으로 물러나게 되어 경영의 공백을 빚게 되기도 했다.



1981년 CRT 터미널 국산화 작업 시제품


여기에 90년 초부터 불기 시작한 다운사이징화와 개방형시스템의 확산은 KCC정보통신을 더욱 어렵게 했다. 특히 1992년에는 자사의 주력상품인 프라임 기종에 대한 美 본사의 신기종 생산중단 발표로 인해 국내 영업에 막대한 피해를 보기도 했다.

또한 스트라투스 기종을 국내 공급하고 있는 자사의 계열사인 연합컴퓨터의 영업과 기술인력이 경쟁사인 동진정보시스템으로 이탈해 감에 따라 더욱더 어려움에 빠지기도 했다.

KCC정보통신은 결국 시대적인 주변상황의 변화요구에 즉각적인 대응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공급업체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다운사이징화로 인한 마진율이 적어지기 때문에 비대해진 자사의 인력을 어떻게 하면 줄여나가느냐에 있었다.

KCC정보통신은 1992년에 500여명의 인력을 절반 수준으로 줄였고, 반월공단에 있는 반월전산을 철수시키고, 소프트웨어를 취급했던 계열사인 국제전산을 매각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보수 경영과 신사업으로 위기 극복
1993년 이주용 회장의 장남인 이상현 현 사장이 당시 기획조정실장으로 부임, 95년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사업 방향을 전면 수정, 현재의 시스템통합사업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BC카드의 차세대시스템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3-tier 클라이언트-서버 방식으로 구현하는 프로젝트를 수주, 1997년 말 성공적으로 개통했다. 이어 98년에는 분당제생병원의 OCS,,PACS, ERM, RIS 등의 업무를 종합적으로 묶은 종합정보시스템도 성공적으로 구축 완료하기도 했다. 증권분야에서도 현대, 신영, 한화, 우리, 동서증권 등의 대외접속시스템으로 스트라투스 시스템을 공급했고, 'ABIS'라는 해외금융시스템패키지를 독자 개발해 홍콩, 싱가폴, 영국, 일본, 중국 등 전 세계 각지에 공급하기도 했다.



1997년 11월 10일 신시스템 오픈기념


이밖에 제조업 분야에서도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등에 PLM 사상이 결합된 한국형 조선CAD시스템인 차세대 시스템을 개발 공급하기도 했다. KCC정보통신의 텃 밭이라 할 수 있는 공공, 국방 분야에서도 유닉스로의 다운사이징 프로젝트를 거의 다 구축하는 등 프라임 컴퓨터 시절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 발전해 나왔다.

KCC정보통신은 그러나 1997년 말 IMF 사태로 인해 엄청난 환차손과 매출격감, 닷컴버블과 벤처 열풍의 후폭풍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특히, 대기업 계열 SI회사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들과의 경쟁은 더욱 더 어려웠다. KCC정보통신은 이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 무차입의 보수 경영을 더 강화했고, 2001년에는 KCC의 자회사이자 서비스 전문 기업인 한국전자계산기술(주)을 시스원으로 바꿔 분사시키기도 했다.

KCC정보통신은 이 같은 어려움을 변신의 기회로 삼아 매출액 1,000억 원대(KCC정보통신 700억원, 시스원 500억원) 를 유지해 나가는 IT서비스 전문회사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국내 최고의 중견 SI 전문회사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2003년에는 혼다자동차의 서울 강북지역 딜러로 선정돼 'KCC모터스'라는 별도 법인을 설립. 3년 만에 누적판매 2,000대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한편, 이상현 KCC정보통신 사장은 기획실장을 맡은 1993년부터 이 회사의 경영을 맡아, 올해로 만 14년여 째 이끌어 오고 있다. 이상현 사장은 "끊임없는 노력과 변신, 사업 다각화 등을 통해 앞으로 40년, 더 나아가 400년까지 이어갈 수 있는 일류 장수 기업으로 성장 발전시켜 나갈 각오이다"고 밝혔다. 그의 부지런함과 보수경영, 끊임없는 노력은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게 주변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KCC정보통신의 희망과 꿈은 그렇게 멀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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