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으로만 평가할 때, 다는 아니지만 자식을 웬만큼 우등생으로 키운 집안을 보면 부모, 특히 엄마의 역할이 특출하다. 엄마가 공부를 하는 건지 아이가 공부를 하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이다. 관심이든 열성이든 극성이든 엄마의 사랑이 아이의 성적을 좌우한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시중에 나와 있는 교육에 관한 책 가운데 엄마를 독자로 간주한 제목이 상당수 눈에 뜨인다. 출판계에선 엄마의 손에 잡히는 어린이 책이 잘 팔린다는 말이 이미 오래 전부터 나돌고 있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말은 아이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론 아이들을 남들보다 더 먼저 일찍 아이 성적높이기에 집중함으로서 앞선 아이, 좀더 빨리 어른으로 키워왔다는 얘기가 아닌가.

미국의 명문사립대학들이 한국학생들의 만점에 가까운 우수한 성적을 비판하며 문제풀이에 능숙한 한국학생들이 꼭 유능한 학생은 아니더라며 학생의 다른 학업능력, 예를 들면 예체능이나 학업 외 교내활동과 봉사경험 등을 입학자격에서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최근 본 적이 있다. 이런 기사가 나오니 우리 엄마들은 아이를 점수 잘 따기 식으로 키워왔듯이 봉사니 교내활동에도 적극 개입을 해 성적 외에도 서류기록상으로 미국 대학이 요구하는 화려한 경력을 추가시키기에 또 혈안이라는 말도 들린다. 이런 현상은 단지 공부라는 성적표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두각을 보이는 스포츠 선수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또한 부모들의 경제력에 의해 좌우된 지 오래되었다. 특히 수영이나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어린 선수들의 뒤에는 거의 부모의 엄청난 경제적 지원이 따르고 있다. 스포츠 역시 공부 못지않게 경제의 힘과 부모들의 열성이 합해진 어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거라는 얘기이다. 과거 조오련 선수와 같이 고향시골 강가나 바다에서 자연스레 익힌 수영선수는 이제 찾기 힘들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린 단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있는 화려한 결과에만 박수를 치고 환호한다. 우리는 금메달 뒤에 일어나곤 하는 코치와 선수 결별이니 하는 이해 못할 뉴스를 들으며 고개를 갸우뚱해 하며 안타까워하고 안쓰러워지기도 한다. 들어보니 돈에 관련된 일로 갈라지는 일이 다반사란다. 돈에 의해 만들어지고 돈에 의해 어긋나고...

우리는 우리 교육의 문제점으로 너무 서둘러서 생기는 조기교육과 그에 따른 조로현상을 지적하곤 하지만 여전히 이에 의존할 뿐 다른 대처방을 찾지도 않고 있는 듯하다. 공부든 스포츠든 어린 나이엔 국제대회를 휩쓸곤 하는데 스물 살이 넘으면 오히려 우리 아이들은 국제무대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이라면 다 알고 누구나 다 말하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의 중학교 수학책을 보게 되었다. 수학책은 영어를 잘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숫자들로 엮어져 있기에 책을 넘기며 미국의 수학문제를 풀 수가 있었다. 수학에 가장 겁을 내고 있어 성적도 안 좋은 우리 집 아이에게 풀어보게 했다. '영언데 내가 어떻게?' 하던 아이가 '이렇게 쉬운 문제 하나 가지고 몇 페이지나 설명하고 있는 거야? 우리 참고서면 반 페이지면 설명 끝일 텐데.' 수학성적이 80점을 넘겨본 적이 없는 아이가, '미국 수학 무지 쉽구나' 한다. 물론 내가 설명으로 거들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 학생들이 미국 등 외국에 나가면 특히 수학에선 두각을 보인다고 하는 말은 많이 들어왔다. 이래서구나 싶었다. 관심을 가지고 수학책을 들여다보니 쉽게 그러면서도 과정에 충실한 설명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답보다도 결과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 중시된 듯했다. 이렇게 공부한 수학은 쉬이 잊혀지지 않겠구나, 또 주입식의 우리 수학문제풀이는 풀 때만 알고 있을 뿐 덮고 다른 문제로 넘어가면 금세 잊혀지고 말 수밖에 없구나 라며 미국과 우리의 공부방식의 비교도 어렵지 않게 하게 되었다.

틀에 넣고 그에 짜맞춰져 키워지는 돼지는 포동포동 살이 잘 쪄 무게로만 가격이 매겨지는 상품으론 대접을 잘 받는다. 하지만 돼지도 여러 종류라 녹차를 먹여 키웠다느니 인삼을 먹여 키웠다느니 가둬 키우지 않아 스트레스 없이 키웠기에 살이 부드럽다는 자랑을 늘어놓는 돼지 광고도 본 적이 있다. 돼지에게 뿐만 아니라 된장을 숙성시키는 데에도 음악을 틀어주었다느니 하는 이러한 별스런 방법들은 상품에서 더 높은 가치로 취급을 해주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돼지와 비교하고 된장에 비유하니 지나친가? 어찌 다른가, 이제 우리 어른들이 냉정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당장의 문제풀이에 능통한 우리 아이들로 키울 것인가, 자연과 더불어 호연지기를 키우며 자라는 아이들로 키울 것인가?

몇 년 전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이다. 십여 명의 대학생들이 가을비를 가로지르며 자전거를 타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서툰 영어로 그들을 세웠다. 그들은 우리 학생들처럼 핸드폰을 지니고 있진 않았다. 대신 그들은 자전거를 산다고 했다. 우리 학생들이 손만한 크기로 우리 손에 맞게 진화한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 소통하고 있을 때 서양 학생들은 산악자전거에 몸을 싣고 2천 여 미터 높이의 알프스 산을 타고 있었다. 특별한 아이들을 만난 것이겠지 싶었다. 보름 동안의 프랑스 체류 기간, 내 관심은 여기에 몰려졌다. 프랑스 전역의 테제베 기차 문엔 자전거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자전거가 들어가기 쉽게 배려한 널찍한 문이었다. 파리에선 전철 안으로 자전거를 밀고 들어오는 이들을 종종 보았는데 남들은 불평은커녕 자리를 비켜주는 분위기였다. 이러다가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로 넘어왔다는 스위스 할머니들을 만났다. 두 분 할머니는 고향인 스위스 바젤을 떠나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닿았고 독일로 넘어가 라인 강을 따라 다시 고향으로 향할 것이라고 했다. 나에겐 흔치 않은 광경이라 호기심에 물었다. 그러나 그네들은 흔한 일이라며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보는 눈치였다. 부모로부터 이러한 실천적 삶을 배우고 자란 아이들을 떠올리며, 알프스 산을 내려오던 산악자전거 즐기던 프랑스 대학생들과 자전거를 끌고 전철 안으로 들어오던 프랑스 학생들의 자연스러운 표정을 엿볼 수가 있었다. 전철이나 기차에서도 자전거를 끌고 타도되게끔 사회 인프라가 구축돼 있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고 부모로부터, 그 위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자연과 어우러진 생활에서 또 자연스러움을 볼 수 있었다. 내 스스로 어색해하면서 프랑스 대학생들에게 물었다. 자전거를 옆에 차고 있는 학생들이 아니었다. 길에서 만난 이들이었다. "돈 백 만원이 주어진다면 무얼 하겠는가?" 여행이 가장 많았다. 대답이 막연해서 다시 물었다. "그 돈으로 핸드폰을 사겠느냐 자전거를 사겠느냐?"고 물으니 대답 대신 그것도 질문이냐, 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핸드폰은 왜 사? 이런 반응을 보였더랬다. 우리 학생들은 어떤 반응일까?

소든 닭이든 동물들에게 우리에 가둬 키우는 것보다 풀어 키우는 방목이 훨씬 더 좋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키워지고 있는가? 지나친 표현이라 하겠지만, 바다생선을 가둬 키우는 가두리 양식이라는 게 있는데 좁은 한정된 곳에 가둬 키우다 보니 물고기들끼리 자주 부딪히고 이래서 피부가 손상을 입기 쉽단다.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항생제를 투입하게 되는데 그 뿌려대는 양이 상상 이상이라며 그 업에 종사하는 한 친지는 '항생제를 고스란히 우리가 먹고 있는 꼴' 이라며 절대 가두리양식으로 길러진 생선회는 먹지 말라고 경고한다. 가둬 키우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하물며? 어릴 적부터 경쟁이라는 울타리에 가둬 키우다시피 하는 우리 아이에게 있어서의 항생제는 그럼 무엇일까? 정신이 뜨끔해진다.

방목과 방치는 분명 다르다. 물론 방치를 해서는 안 된다. 놓아 키우는 소들이라고 목동들이 무조건 내팽개치지는 않고 오히려 우사에 가둬 키울 때보다도 방목은 더 크고도 더 넓고 깊은 관심을 풀어놓은 소들에게 보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을 풀어 놓아 키우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이 생각하고 사는 부모들은 없는지? 그러자니 간섭으로 보일만큼 지나치게 아이를 감싸고만 키우는 부모들은 없는지? 일부에선 방목형의 교육을 지향하고자 실천하는 부모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극히 소수이며 이들은 기존 교육체계나 체제에 어긋나고 정규과정이 아니라는 이유로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한다. 정부는 물론 사회인식으로부터도 기성의 가둬키우기 식 교육(가두리 식 교육)을 줄여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미래의 우리 아이들 세상에선 진정한 경쟁력은 무엇일까, 주의 깊게 고려해본다면 다음의 예는 그저 과거교육제도 하에서의 본보기일 뿐 요즘 세태엔 맞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우리 부모들이 곰곰 생각해볼 대목이라 여겨져 옮겨본다.

중국 당나라 때, 나무 심는 법으로 세상의 도를 설명한 책이 있었다. <나무 심는 곽탁타의 전기>라는 책인데, '모종을 할 때는 자식 같이 정성 드려 해야 하고, 그 뒤엔 버리듯이 놔둬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나무는 뿌리를 펴줘야 하고, 고르게 북을 돋아줘야 하고, 옮기기 전에 묻은 흙을 그대로 사용해야 하고, 심을 때는 빽빽하게 꽂아둬야 한다. 일단 이렇게 정성을 드린 후라면 움직이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말고 다시는 돌아보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와 반대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무를 심어놓고 사랑이 너무 깊은 나머지 심하게 근심하고 아침에 보고 저녁에 와서 또 들여다보고, 한번 갔다 다시 와서 보고, 더 심한 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흔들어도 본다. 이것은 오히려 나무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관심도 이러하고 백성에 대한 정부의 간섭 또한 이러한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아이에게 이렇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은 좀더 멀리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내다보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눈 앞의 당장의 것으로 조급해지는 나를 이와 같은 나무 기르기로 그 조급증을 조금씩 가라앉혀 눌러보곤 한다. 아이로 인해 내가 더 성장해 더 어른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다 자란 줄 알았는데 아이로서 어른이 되어가니 나이 오십에 참으로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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