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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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동행유람 5
아빠와 아들과의 대화 - 유배지를 찾아서

아빠; 여름방학이 시작됐지? 장마가 오래 가니 어딜 선뜻 나서기가 좀 꺼려지는데... 공부 하느라 애썼는데 한 군데라도 바람 좀 쐬고 와야지?
아들; 아빤 유배지에 다녀와 봤어?
아빠; 유배지? 정약용 선생이 유배되었던 전남 강진이 문득 떠오르는구나.
아들; 유배지에서 오히려 자신의 더 큰 꿈을 키울 수 있었고 유배지에서의 다른 삶으로 후세에 이름을 더 크게 남겨놓을 수 있었던 역사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서.
아빠; 유배에는 대개 멀리 쫓겨나 몸이 갇힌 경우고 중국의 사마천과 같이 직위를 모두 박탈당한 경우의 유배도 있단다.
아들; 사마천이라면 <사기>를 쓴 중국 최고의 역사가잖아? 그 분이 어떤 일을 당했는데?
아빠; 한나라 무제 때 이릉이란 장군을 변호하다가 황제비방혐의라는 중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뒤에 극형에 속하는 궁형이란 거세형으로 사형은 피하고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지. 그 뒤 그는 필생의 역작인 <사기>를 이 기간에 완성하게 되거든? 인생사 새옹지마라 하고 전화위복이란 말도 있잖니? 미래가 어찌 될지 모르는 암울한 시간을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자기의지에 의해 전혀 다른 삶으로 바꾸어 놓을 수가 있었던 사람이지.
아들; 우리나라에도 그런 분들이 많은데 먼저 어느 분 곁으로 가볼까?
아빠; 다산 정약용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가 보자꾸나.
아들; 전에 보성차밭에 갈 때 엄마 아빠랑 잠깐 들렸던 곳이지?
아빠; 그랬었지? 강진에서 해남 쪽 바닷가의 낮은 산인 만덕산 속에 있는 다산초당은 길이 잘 닦여져 있어 지금은 그리 멀리 느껴지지 않지만 유배 당시엔 꽤 깊숙했던 곳이었음을 실감하게 될 거야. 한반도의 남단 끝이거든. 다산초당 입구에 현대식 건물 다산 기념관 뒤로 두충나무가 줄 지어 있는 오솔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면 바다가 가까우면서도 바다가 보이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원래 초가였던 다산초당이 있단다. 정약용 선생이 처음에는 포항 쪽에 유배되었다가 바로 여기로 옮겨져 18년간 강진을 떠돌았다 하는데, 다산초당에선 1년 반 정도 머무르셨데. 강진에서 그곳 백성들을 직접만나 백성들의 고난과 고충을 듣고 이것을 <목민심서>라는 책으로 남기게 되었지. 실제로 정약용 선생이 지방 관리로 있을 때 통치에 불만을 품고 관가에 쳐들어온 이계심이란 사람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적도 있었다는데, 백성의 항거가 타당했다고 보았던 거야. 이것 또한 당시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다산의 민권의식, 또는 애민정신이라고 할까? 다산초당은 정말 초라해보이지만 다산이 직접 꾸몄다는 연지석가산엔 아직도 산에서 흐르는 물로 물길을 만든 대나무에서 물이 개울처럼 흐르고 이 물이 모여 연못을 만드니 정원이 아담하고 선생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가 있었어. 작으면 작은 대로 선생의 손때가 고스란히 서린 그대로 보전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산했던 기억이 생생하구나.
아들;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는 서울 가까운 곳에도 있지 않나?
아빠; 경기도 남양주 조안면에 가면 선생의 생가와 묘소를 만날 수가 있단다. 양수리에서 팔당 땜 방향으로 가면 나와. 이곳에서 유배지, 강진을 더듬어보는 것도 꽤 괜찮을것 같구나.
아들; 정약용 선생의 형제들도 사형을 당하고 유배를 떠나야했다고 들었는데...
아빠; 정약용 선생의 둘째 형인 정약전 선생의 유배지는 전남 흑산도란다. 지금도 가기가 힘든 아주 먼 곳에 갇히게 된 거지. 동생인 정약용 선생은 강진으로 형인 약전 선생은 흑산도로 갈려 떠나야 했던 이들 두 형제는 그 후 영영 만날 수가 없었데.
아들; 흑산도에서 돌아가셨나?
아빠; 그래. 그곳에서 체념하지 않고 <자산어보>란 아주 귀한 책을 후세에 남기셨어. 자산이란 흑산을 말하며 흑산도에 16년 동안 머물면서 흑산도 주변의 어종들을 연구하시어 책으로 남기게 된 거지. 일종의 물고기 연구서인데 당시 상상도 할 수 없는 획기적인 생물 연구서랄까? 그 책에 나오는 상어의 종류만 해도 엄청나데. '기름상어' '게상어' '참상어' '죽상어' '귀상어' '철갑상어' 등등 상어만 18종 이상이 나온다는데, 이 상어들이 흑산도 주변에서 목격되었다니 자료로도 귀중하겠지? 지금은 대학마다 생물학과가 있는데 이처럼 자세히 우리 바다에 대해 철저히 연구를 하고 있을까? 이래서 약전 선생의 업적은 대단해 보였어. 그러나 이것도 소중하지만 남들 같으면 한양으로의 복귀와 복직 등 재기를 노려 임금에 대한 충정의 시를 읊거나 아님 포기하고 살았을 텐데 정약전 선생은 유배지에서도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생각, 그곳에서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셨다는 데에 더 의미를 찾아야할 거다. 몸은 갇혔어도 마음은 열렸던 분이었지. 하지만 아쉽게도 흑산도엔 선생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하니, 흑산도를 답사한 이병주 선생은 우리 역사는 진정한 선인 모시기에 소홀해서 씁쓸하기만 하다는 감회의 글을 남겼어. 우리 선인 중엔 많은 위인이 있었지만 정약전 선생처럼 후세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잊혀지고 있으니 아빠도 이점이 무척 아쉽고 화가 나더라.
아들; 나도 동감이야. 우린 우리의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하고 천대하는 경향을 지금도 주변에서 많이 봐.
아빠; 우린 그러지 말자. 그럼 또 더 가볼까? 남쪽 바다 끝에 유배지가 많았더라. 지금은 한려수도국립공원이 된 경남 남해에서도 배 타고 나가야 할 만큼 더 먼 섬인 노도로 가보자꾸나. 노도는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가인 김만중 선생의 유배지였단다.
아들; 작가도 유배를 보냈어?
아빠; 조선시대엔 당쟁싸움으로 편이 갈려 싸움이 잦았던 때인데 서포 김만중 선생도 세도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나 이에 휩쓸리게 된 거지. 서인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소위 임금모독죄로 유배를 떠나야 했데. 남해는 지금 연육교로 이어진 육지 같은 섬이 되었지만 그 때는 바다 한가운데 섬이었고 그곳에서 또 더 바다로 보내졌으니 바다 가운데 갇힌 심정은 어떻겠니? 상상이 가니?
아들; 노도라는 섬에서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라는 소설을 쓴 거야?
아빠; 응. 이들 작품 때문에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정치가에 더 가까웠던 인물이 김만중이란 사람인데, '사씨남정기'는 숙종 임금의 마음을 돌리려는 의도로 쓰였다고 하고 '구운몽'은 늙은 어머니를 떠올리며 썼데. 구운몽에 대해 좀 얘기해줄게. 하룻밤 새 그는 부귀영화를 다 누리게 돼. 그러나 깨어보니 꿈이었고 자기의 현실은 작은 남해 바다에 갇힌 몸일 뿐이었지. 여기서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걸 깨닫게 돼. 아등바등 치고박고 싸워왔던 정치판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선생은 꿈에서 자기의 처절한 현실을 보았고 한편 두고 온 노모를 떠올리고는 아들을 멀리 떠나 보낸 어머님의 심정은 어떨까 헤아리게 되지. 이 심정을 소설로 남긴 것이고.
아들; 반대로 생각하면 유배를 가게 돼 오히려 더 뛰어난 작품을 남기게 된 거네, 그지?
아빠; 그렇지. 바로 그거야. 소위 정치가로서 승승장구 했다면 이런 소설은 후세에 남길 수 없었겠지? 우리가 유배지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바로 막막하고 암울한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었던 자기의지겠지? 체념하여 불평만 하고 있었다면 그저 실패한 사람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게 되었을 거야.
아들; 어떻게 마음 먹느냐에 따라 전화위복의 기회, 재충전의 심기일전이 되는 거구나. 점점 흥미로워지는데 아빠가 아는 또 다른 유배지가 있어?
아빠; 제주도에도 귀양 보내진 인물들이 많은 걸로 아는데...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 대정에서 9년간의 유배생활을 해야 했단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리셨다하거든?
아들; 추사체라는 중국과 다른 우리만의 독특한 글을 남기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분도 귀양을 보냈단 말이야?
아빠; 아까 김만중 선생과 비슷한 이유에서지. 당쟁에 휘말려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나봐. '세한도'가 그려진 일화를 들어보렴. 유배를 당하자 관직에 있던 시절, 잘 알고 지내던 친구나 친지들은 연락도 없었는데 유독 역관으로 중국을 오가던 이상적이란 분이 중국에서 가져온 책들을 제주도로 보내주며 우정을 나눴데. 이에 보답하고자 김정희선생이 세한도를 그려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세한도는 그림도 걸작이지만 이런 변함 없는 우정의 표상으로도 아빠는 더 오래 기억하고 있단다.
아들; 나도 제주도는 몇 번 가봤는데 대정은 제주도 어디쯤에 있어?
아빠; 제주도 서쪽으로, 협재 쪽에서 용머리 해안으로 가는 길에 있데. 아빠도 안 가봤으니 함께 꼭 가보자. 그곳엔 그 때 당시의 것은 남겨진 게 거의 없으니 역시 또 아쉬울거야. 하지만 이상적과 김정희란 두 분의 우정은 더듬어볼 수 있지 않을까?
아들; 약속! 정말 가보고 싶어.
아빠; 그럼. 너랑 꼭 가보고 싶은 곳이라서 아빠가 남겨뒀지. 얘기 나온 김에 유배지 기행을 계속해볼까? 이번엔 송시열 선생이 제주도로 유배를 가다가 만난 폭풍에 잠시 머물게 된 보길도야. 그분이 짓고 새겼다는 '글씐바위'가 아직 남아있어. 여든 세살의 나이에 귀양을 가는 한탄스런 심정을 읊었다 해서 탄시라고 불려지지.
아들; 보길도는 윤선도 선생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잖아?
아빠; 송시열 선생과 함께 평생 세 번이나 유배를 떠나야 했던 윤선도의 삶이 어려 있는 곳이기도 하지. 윤선도 선생은 일흔이 넘어 임금에게 바른 소리 한 마디하고 유배를 떠나게 되거든? 이랬었데. 나라가 혼란한 이유는 임금이 바른 정치를 펴지 못해서라고. 이런 직언을 보통 사람은 감히 하지 못할 텐데 그 이유로 10년의 긴 세월을 유배지에 갇혔다가 말년에 보길도로 내려와 사셨다는구나.
아들; 그 연세면 편히 쉴 마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하고 살 텐데...
아빠; 그러니 위인인 거지. 그러니 지식인이고. 이번엔 지금까지 이야기한 유배지와는 다른 유배지로 가보자. 권력이란게 도대체 뭔지, 권력무상을 절로 떠올리게 될, 왕의 자리를 찬탈 당한 임금들의 유배지도 있단다. 고려 최후의 임금인 공양왕이 유배되어 결국 살해된 곳으로 강원도 삼척 맹방해수욕장 지나 궁촌해수욕장에 공양왕의 능이 있거든? 공양왕의 묘는 두 군데가 있는데 이곳과 서울 근교 고양시에도 있단다.
아들; 고양시에 있는 공양왕릉은 가봤는데, 어떻게 묘가 두 개일 수가 있었지?
아빠; 조선을 세운 이성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성계의 신하가 공양왕을 살해하고 난 뒤 몸의 일부분만 한양으로 가지고 갔기 때문에 몸이 둘로 나뉘는 끔찍한 죽임을 당한 공양왕은 삼척에 그리고 한양 근처인 고양, 이렇게 무덤도 두 군데로 나뉘어 남게 된 거라더구나.
또 단종애사의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월의 청룡포가 단종의 유배지라는 건 잘 알고 있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삼촌인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사약을 내려 결국 청룡포에서 죽이잖아. 세조는 세종의 아들이고 단종은 세종의 손자니 성군이라는 세종도 자식의 권력욕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던 거지. 하기야 세종이 돌아가신 뒤지만 말이야. 또 있는데, 서울 한복판에 한 여인에겐 유배지나 다름없는 곳이 있단다. 인왕산의 '치마바위'라는 곳인데,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임금에 오르자 중종의 비인 신 씨의 부친이 연산군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중종의 비, 신 씨도 궁궐에서 쫓겨 나게 되자, 쫓겨난 부인은 인왕산의 큰 바위에 매일 올라가 자기 치마를 널어놓고 생이별의 서러움을 달래야 했었데. 신 씨 부인은 치마로서 자기가 가까이에 있음을 알린 거지. 이를 알게 된, 힘없는 허수아비 임금 중종 역시 경회루로 나와 멀리서나마 부인의 치마를 보는 것으로서 부부의 정을 나눌 뿐이었다니 권력의 덧없음이 실감이 되니? 그 후 붙여진 이름이 '치마바위'야. 광화문 쪽에서 인왕산을 올려다보면 보이는 너른 바위가 치마바위란다.
아들; 치마바위는 가까운 곳이니 먼저 다녀와야겠다. 버스로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빠; 친구랑 함께 가보렴. 친구에게 이런 얘기도 전해주고.
아들; 치마바위에서 경복궁이 보이나 직접 답사도 해봐야지.
아빠; 그래. 얘기만 듣는 것보다 실지로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 보면 그 감회는 전혀 다를거야. 멀지 않으니 너희들끼리 다녀와도 좋고. 신나는 여름방학을 누려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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