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일본·한국 3개국 경제발전 공통분모는 ‘충직문화’, 평생 직장/충직 문화의 회복에 투자해야

제 12차 다산 & 영림원 CEO 포럼에서 윤석철 한양대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가 ‘충직 문화와 조직의 흥망’을 주제로 강연했다. 윤 교수는 이번 강연에서 “충직은 희생적 소수의 정신”으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스위스, 일본, 한국 등 3개국은 공통적으로 충직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평생직장 개념과 충직 문화를 가진 회사가 우량 기업으로 성장한 예가 많다는 점을 들어 앞으로 평생직장/충직 문화의 회복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연 내용을 정리한다. 박시현 기자 pcsw@rfidjournalkorea.com

윤석철 suckchul.yoon@gmail.com
한양대 석좌교수/서울대 명예교수

스위스는 과거에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자원이 없는데다 농토도 전국토의 5% 밖에 안되었다. 이 나라가 살아가는데 유일한 방법은 남자들이 외국 용병으로 목숨 바쳐 돈을 버는 것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황제였던 루이 16세에게 고용된 4만명의 스위스 용병이 모두 전사한 사실은 단적인 예다. 이런 나라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2005년 IMF에 따르면 스위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50,524달러로 미국(42,101달러), 일본(35,787달러) 등을 큰 격차로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패로 희망없는 나라로 전락했지만 지금은 미국과 더불어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은 50년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현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국가로 발전했다. 이 3개국의 공통분모를 보면 충직(忠直)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국가ㆍ사회ㆍ기업 발전은 충직문화 소산
올해 1월 22일 바티칸 교황청은 스위스 근위병(용병) 5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놀라운 사실은 바티칸 교황청은 지금도 스위스 근위병만 채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티칸 교황청이 왕권과 충돌 등으로 인해 위기를 맞이했을 때 다른 나라의 용병은 도망갔지만 스위스 용병은 500년의 역사 동안 단 한번도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바티칸 교황청 등 자기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자기를 고용해준 주인에 대한 스위스인의 빛나는 충직 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런 정신이 윌리엄 텔 전설처럼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 스위스를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만들었다.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스위스는 2006년도 국가경쟁력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핀란드, 3위는 스웨덴, 4위는 덴마크, 5위는 싱가포르였으며, 한국은 24위를 기록했다.
일본은 1945년 동경만의 미조리 함상에서 항복 조인식을 가졌다. 그 조인식 과정에서 미 공군은 미조리함 상공에 500대의 전투폭격기를 띠워 시위를 벌였다. 이 때만 하더라도 일본의 장래는 캄캄했다.
1972년 2월 20일, 일본 사회에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요코이라는 이름의 군인은 일본이 항복할 당시 괌에 있었는데 “일본은 항복했지만 나는 항복하지 않았다”며 귀국을 거부하다가 무려 30년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의 첫 말은 “수치스럽게도 살아 돌아왔습니다”였다. 요코이는 일약 1970년대 일본의 희망으로 떠올랐으며, 그가 했던 말은 직장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요코이 보다 더 지독한 사람이 있었다. 오노다 히로라는 군인은 필리핀 루방섬에서 1944년부터 29년동안 게릴라 생활을 하다가 1974년 3월 10일 귀국한다. 오노다 히로는 “군인은 직속상관의 명령에 따른다”며 섬에 남아있다가 상관의 명령서를 받고서야 20년만에 일본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는 귀국하자마자 일본의 가치관 변화에 환멸을 느끼고 브라질로 이주해 버린다.
이성적인 측면에서 요코이, 오노다 등의 충직은 바보스러운 짓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으로는 이들의 충직 정신을 절대 설명할 수 없다. 일본이 패전 이후 빠른 속도로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것은 이러한 국가에 대한 충직 문화가 직장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IMF에서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2005년 GDP 규모에서 미국에 이어 2위를 확고하게 지켰다.

희생적 소수가 사회ㆍ조직의 발전 원동력
한국 충직 문화의 대표적 상징으로는 사육신을 들 수 있다. 사육신은 1456년 단종 복위운동을 펼치다 죽은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이개, 유성원 등이다. 이들은 자신의 죽음은 물론 3족을 멸하는 조치에도 굴하지 않고 과감히 충절의 길을 선택했다. 충절은 결코 이성이 아닌 또하나의 정신세계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살아서 충절을 지킨 사람들도 있다. 생육신이 그들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 6명의 선비는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인물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척하며, 이곳저곳 떠돌며 방성통곡 하거나 두문불출하며 일생동안 단종을 추모했다.
이들 생육신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은 생육신 사당의 건립으로 나타났다. 국가가 아닌 국민 즉 유림의 건의로 1706년 경남 함안에 서원을 세우고 지금도 민간 주도로 이 분들에 대한 제사인 국천제(菊薦祭)를 지내고 있다.
이처럼 유교적 전통에 따라 나라에 충성하는 형태로 발전해온 한국의 충직 문화는 1970년대부터 가족과 직장을 위한 헌신 문화로 전환한다. 서독에 파견된 간호원이 그 예이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원조 중단 사태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서독 정부에 차관을 요청한다. 서독은 한국의 상환 능력에 회의를 품고, 간호원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데 이는 예치된 급료를 동결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서독 정부의 이러한 예상은 빗나갔다. 간호원들은 급료를 받자마자 그 80% 이상을 한국으로 송금했다. 자신들은 근근히 먹고 살만큼의 돈만 남기고 대부분의 급료를 오빠나 동생들의 대학 등록금으로 보내준 것이다. 바로 이들 오빠나 동생들은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성장해 차관 상환 문제를 해결한다. 지금 국립묘지에 순국선열을 모시고 있는데 이들 산업 역군들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1970년대 초반에 발생한 어느 라면 회사의 이름없는 직원도 충직 정신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이 회사의 라면 수프속에서 애벌레가 나와 한바탕 소동이 벌여졌다, 현장에 회사 직원은 물론 기자들이 몰려 들었다. 회사 직원은 벌레를 보여 달라고 하고 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불쑥 자기 입에 털어 넣었다. 그의 말이 걸작이다. “이게 라면 부스러기지 무슨 벌레요!” 현장의 기자들 조차 그 직원의 충직(애사심)에 감복했다. 당시 28%에 불과했던 이 회사의 라면 시장 점유율은 현재 72%이다.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법칙으로 설명하면서 창조적 소수의 역할을 강조했다. 하지만 서독에 파견된 간호원이나 벌레를 먹은 이름없는 라면 회사의 직원 처럼 희생적 소수가 있어야 사회나 조직은 발전한다. 이들 희생적 소수는 뭔가의 보상을 바라고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다. 사실 1970년대에는 기업에 보상제도 조차 없었다.

충직 있는 곳에 기적 있다
이러한 한국의 충직 문화가 최근 들어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전쟁 나면 싸우겠다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현상은 충직에 관한 가치관이 변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21세기 평화재단이 2005년에 실시한 ‘한국인의 삶과 가치 변화’라는 주제의 여론조사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싸우러 나가겠는가”는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은 1995년 80.2%, 2001년 74.5%, 2005년 72.7%로 갈수록 점차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20대 연령층은 1995년 77.9%, 2001년 65.9%, 2005년 63.9%로, 젊은이들의 충직관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놀라운 사실은 2006년에 한국청소년개발원이 20대 연령층을 실시한 똑같은 질문의 설문조사에서 그렇다는 응답은 고작 10.2%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직장에 대한 충직 정신도 점차 낮아지고 있다. 자기 직장의 기술을 빼서 외국에 파는 직원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이 단적인 예다. 국정원에 따르면 기술 유출 사건은 2002년 5건, 2004년 26건, 2005년 29건으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충직 문화를 갖고 있는 기업은 놀라운 발전을 보이고 있다. 대우건설이 그 대표적인 회사이다.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대우건설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수주 불능 상태에 빠졌다. 대우건설은 이제 끝났다는 평가가 대세였다. 직원들은 회사를 속속 떠났다. 그렇지만 끝까지 회사를 지키겠다는 충직 그룹이 대우건설에 존재했다. 이들 충직 그룹은”우리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뿐”이라며 눈물겨운 노력을 펼친다. 이들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이미 수주한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충직 그룹은 이를 철두철미하게 시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자고 뜻을 모았다. 채권단과 단판을 벌여 수원의 건설연구소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자금 지원도 받아 연구개발에 매진해 주상복합구조 기술이나 특수콘크린트 기술 등을 선도적으로 개발하기에 이른다.
2006년 건설교통부가 발표한 종합시공능력평가에서 대우건설은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시공능력, 기술능력, 자금능력 등의 항목으로 이뤄진 평가에서 대우건설은 비록 자금 능력에서는 종합 2위를 기록한 삼성건설에 뒤졌지만 월등한 충직 정신은 1위를 달성한 결정적인 배경이 됐다. 대우건설은 충직이 있는 곳에 기적이 있다는 진리를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충직 철학에 대한 교육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충직은 국가의 경제 발전 뿐만 아니라 기업의 위기 극복, 정상 등극 등의 뚜렷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국가, 사회, 기업 등 조직의 발전은 우연이 아닌 충직 문화의 소산이다. 충직은 이성을 초월한 정신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조직 문화의 소산이며, 이러한 조직 문화는 투자와 노력의 산물이다.
한국 기업은 현재 전략이나 기법 극기훈련 등을 강조할 뿐 충직 철학에 관한 교육은 부재한 상태이다. 실제로 이러한 충직의 부재로 인해 ‘평생직장 시대는 끝났다’는 말 마저 나오고 있다. 그런데 평생직장의 개념이 없으면 직장에 대한 충직은 기대할 수 없다. 평생 일할 회사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능력을 발휘하겠는가? 서양에서도 평생직장 개념과 충직 문화를 가진 회사가 우량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지금은 평생직장과 충직문화를 회복할 수 있는 교육에 투자가 필요할 때이다. 부산과 경남 양산 등 2곳에 캠퍼스를 갖고 있는 영산대학교는 충직 문화를 회복하기 위한 도덕성에 대한 투자에 가장 적극적인 대학으로 꼽을 만하다.
끝으로 역사 발전을 이끄는 창조적 소수와 희생적 소수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의 문제가 남는다. 성과급은 돈이 최대의 가치관으로 자리잡은 시대에 걸맞게 거의 모든 기업에서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성과급에 반대한다. 이들 희생적 소수에게 돈을 주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명예 등 정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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