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환 (주)경암자산관리 부회장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며 어머니의 방문을 가만히 열어 보았다. 언제나 침대에 누우셔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셔야 할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순간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지고 몸은 휘청거리면서도 술기운이 확 깨어버리는 것 같았다. 가끔 술을 마시고 아침에 운전을 하기 위하여 차를 찾다가 간밤에 주차한 곳을 기억하지 못하여 이리저리 찾아 헤매던 적은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윗도리를 소파에 팽개치며 털푸덕 마룻바닥에 앉으니 처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어머니가 어제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고 계신 것이 불쑥 생각이 났다. '이런 무심한 자식 같으니라고…'

늘 어머니는 아무 일이 있을 수 없다는 나의 사고에 한방을 올려 부친 것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5시면 기상하시어 십자가 고상을 앞에 두고 새벽 기도를 하시고 아침식사 후에는 매일 9시에 집에 가까이 있는 성당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셨다. 이런 까닭에 가끔씩 주일을 거르는 나를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시며 성당을 가지 않은 것을 탓하시는 말씀에 이제 오십이 넘은 나로 하여금 가끔은 야속한 생각이 들게 하였다. 손자, 손녀들이 영세를 받고도 성당에 다니지 않는 것에 대하여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면서, 부모가 잘 타일러서 인도하지 않는다고 늘 불평을 털어 놓으시곤 하셨다.

팔십 평생을 오직 자식 잘 되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며 온갖 고생을 하시면서 사신 분을 내가 생각해도 너무 무심한 행동을 한 것에 어떻게 속죄를 해야 할 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했던가?'남편을 일찍 사별하시고 젊은 나이에 딸 하나 아들 하나 데리고 평생을 혼자 살아오신 어머니시다. 어찌 우리 어머니만 그렇겠냐? 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아들이 늘 곁에서 지켜본 그 분의 일생은 희생과 사랑을 위해 사신 존경스런 그런 삶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형제들이 어릴 적에는 하루 삼 세끼를 거르지 않기만 해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도 우리는 그런대로 불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뜻하지 않은 일로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져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를 고향인 청주에 두고 혼자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떠나시면서 3년 안에 너희와 함께 다시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굳은 약속을 하셨었다.

우리 남매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어머니께서 하신 고생은 미루어 짐작컨대 말로는 이루 다 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3년이 경과할 즈음에 어머니는 정말로 약속을 지키셨다. 금호동에 작은 전월세 방을 마련하여 누나를 데리고 갔고, 나도 그 이듬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꿈에도 그리던 가족과 함께 합칠 수 있었다. 우리 어머니의 살아오신 발자취를 보면서 나는 공중파에서 인기리에 방영했던 한편의 드라마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어머니는 이젠 손자, 손녀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80평생을 잘 마무리 하신다며 늘 하느님께 감사하고 은총을 받은 삶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던 어느 날, 방학을 해서 집에 있던 둘째 딸로부터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 아빠,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병원으로 실려 가셨데요"라는 이야기에 나는 혼비백산하여 일하던 것을 팽개치고 급히 114로 문의하여 병원을 확인한 후 출발하였다. 가는 동안에 온갖 억측이 난무하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돌아가신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혹시 불구자가 되시지는 않을까? 그러면 여생을 어떻게 돌봐 드려야 하나? 등등…'이루 말할 수 없는 걱정으로 운전을 어떻게 하며 병원에 도착했는지 몰랐다.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왼쪽 다리 전체를 깁스를 하신 채 병실에 누워 계셨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파악할 즈음에 어느 낯선 남자가 내 앞에 다가와서는 죽을 죄를 졌다며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곁에 있던 내자가 급히 가해자가 많이 뉘우치고 있음을 상기 시키며 나의 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였다. 어머니께서는 피해를 당하여 고통 속에 신음하시면서도 가해자가 빨리 조치를 해 주어서 고마웠다는 말씀과 부주의로 인한 사고이니 너무 나무라지말라고 하셨다.

하기야 가해자가 사고를 내고 도주를 했다거나 사후 조치를 제 때에 하지 못하여 더 큰 후유증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해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약간의 긴장이 풀리면서 가해자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어 보았다.

사고 경위는 어머니께서 늘 아침 미사를 가시기 위해서 집 앞 건널목을 파란 신호가 들어와서 건너던 중 갑자기 승합차가 돌진해와 순간적으로 넘어 지면서 무릎과 발목 부위를 크게 다치게 되셨다는 이야기였다.

80이 넘은 노인에게 병원 생활은 감당하기에 너무 무리인 것이 많았다. 대소변을 혼자 해결할 수 없으니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고, 움직이지 못하고 침상에 누워서 생활을 해야 하니 성한 사람도 생병이 날 지경이었다. 매일 수척하다 못해 몸이 왜소해지시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아픔을 대신하지 못하는 것이 큰 불효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늘 웃는 얼굴로 맞아 주시며 "아침은 먹고 다니냐?"물으시며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회사 일에 신경 쓰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하셨다. 그리고 어려운 일은 간병인이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신다며 안심을 시켜주셨다. 내자도 열악한 병원 식사를 보충해 주기 위해서 반찬과 간식거리를 준비하여 매일같이 문병을 하였다. 나도 매일 출근 전에 병원에 들러 간밤의 상태와 차도를 문의하였지만 기대치에 항상 못 미처 안타깝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은 흘러 어느덧 3주 째가 경과하였고, 어머니도 이젠 병원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병원에 입원 환자가 밀려들기 시작하자 병원에서는 노골적으로 퇴원을 강요하고, 보험회사에서도 조기에 합의를 유도하기 위하여 접촉을 해 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교통사고 환자는 완전하게 나아도 후유증으로 인한 장애가 언제 재발할지 모르니 퇴원을 하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특히 보험회사는 피해자가 합의를 유리하게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가급적 입원을 연장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내용을 들으신 어머니께서는 모든 것을 나보다는 남을 우선 배려하는 쪽으로 결정하고 싶다고 하셨다. 부당하게 이익을 편취해서도 안 되고 나보다 더 힘들고 아픈 사람에게 내가 조금 불편하고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양보해야 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으셨다. 늘 당신 본인보다는 다른 사람 편에서 생각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 주려는 마음으로 살아오신 나와 내자는 물론 누이도 어머니의 숭고한 정신을 따르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했다. 조금은 내가 부끄럽고 작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병원에서 퇴원하신 후 집에서의 생활은 더 힘든 상태가 되었지만 옛날 정상인으로 있었을 때보다도 더 하느님을 가까이 하시고 늘 기도하는 모습을 잊지 않으셨다. 아마도 어머니는 이런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께서는 이런 작은 어려움을 통해서 본인에게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하려는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하시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퇴근길, 차창 밖에서 갑자기 조용필의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보고 싶지~"라는 노래가 들려왔다. 난 갑자기 운전대의 방향을 바꾸어 엑셀레터를 깊게 밟으며 속도를 높였다.

늘 나를 위해 그리고 남을 위해 기도하시고 희생하시는 어머니를 보기 위해….



※ 본 수필은 본지가 발간한'창공의 빛나는 별 하나'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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