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주 에버그린 법률사무소 변호사

저희 사무실은 시청 앞 잔디 광장 건너편의 덕수궁과 서울시 의회 건물 사이에 위치한 성공회 빌딩에 있습니다. 저희 사무실에서는 옆으로 덕수궁 정원이 보이고 뒤로는 영국대사관 마당이 보입니다. 그리고 성공회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구한말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건물로 주변의 한옥식 수녀원과 어우러져 차분하고 경건한 마음이 우러나오게 만드는 도심 속의 명소입니다.

성당마당에서는 매주 수요일 12시에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나 아마추어 가수들이 무료공연을 하고 성당에서는 관중들에게 주먹밥을 나누어 주어 간단히 점심을 먹을 수 있게 하는 주먹밥 콘서트 행사를 합니다. 게다가, 성공회 빌딩 지하에는 세실극장이 위치하고 있어 손쉽게 연극을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무실을 드나들면서 건물 뒷 편에서 연극 연습을 하는 배우들을 만날 수도 있어 주변이 참으로 운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종로 큰길가로 나오면 상황이 전혀 달라집니다.

시청 앞과 서울시 의회 앞은 항상 각종 민원성 시위와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불법 집회가 끊이지 않는 곳이고, 성공회 빌딩은 1987년 6월 10일 민주화 항쟁 시 민주화의 주역들이 모여 거사를 모의하던 역사적 장소라서 그런지 이런 집회들을 불러 모으는 흡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공회 교회 역시 종교적 이유로 그런 것인지 주변의 이런 불법 집회들에 대하여 상당히 아량을 베푸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하루 중 상당 시간을 머물며 일을 하고 휴식도 취하는 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으며, 각자의 경제 활동 및 생존에 위협을 받을 지경입니다.

오늘도 저는 조용하고 사색 공간인 성공회 성당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과 같은 불법집회와 시위꾼들을 보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正義, JUSTICE)와 내가 생각하는 정의란 어떤 것일까, 얼마나 차이가 나는 것일까? 하는 다소 철학적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인간이 '만인(萬人)에 의한 만인(萬人)의 투쟁 상태'인 원시 시대를 벗어나 이성(理性)이 야만성을 지배하고 사회 공동생활을 시작하면서 국가(國家)를 만들어 나가게 되자, 인류의 지도자나 선각자, 또는 철학자들은 인간 생활을 조화롭게 규율하기 위한 정의를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정의를 기초로 한 법(法)을 만들려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비로소 원시 혼란 상태로부터 벗어나 평화와 번영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시작된 것입니다.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현대 철학자들까지 정의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는 다소 다른 점이 있는데, 고대의 철학자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본질이 평등'이라고 하면서, 정의를 분류하여 모든 사람을 획일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하는 평균적 정의와 각자에게 각자의 적합한 몫을 나누어주는 배분적 정의로 나누었습니다. 울피아누스는 '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고자 하는 항구적인 의지'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20세기 철학계의 거목 존 롤스는 그의 저서 '정의론'에서 '정의란, 철학적 진리나 종교적 신념이 아닌 사회적 합의의 대상'이라고 하여 정의가 사회적 여건과 합의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상대적인 가치임을 표방하였습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사회체제나 지배세력의 생각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변화되어 온 것입니다. 씨족사회나 부족사회에서는 족장이, 전제 군주시대에는 전제 군주 1인이, 과두 정치시대에는 몇몇 소수 정치 세력이, 귀족 정치시대에는 귀족집단이, 민주 시민사회에서는 다수 국민의 대표들이 정의의 개념을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정의에 대한 판단이 법인 것이며, 인류는 그 정의에 기초한 법 규범을 만들어 사회를 유지해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올바르다고 결정된 정의에 기초한 법은 올바른 것이며 지켜져야 하는 것이므로, 사회 구성원의 일원에게는 이를 지켜야할 '복종의 의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복종의 의무는 정의의 원칙 중 하나라 할 것입니다. 적법한 절차에 의하여 결정된 명령은 정하여진 불복 절차에 따라 다투어야 하고 설득 또는 불복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다수의 이익과 사회 유지를 위하여 복종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법이란 정의에 기초한 것이므로, 이러한 법을 파괴하려는 것은 불의(不義)이고 인류를 다시 원시 투쟁사회로 되돌리려는 잘못된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토론을 통한 진리탐구와 '악법(惡法)도 법(法)이다(Dura lex, sed lex)'라는 말로 유명합니다. 그는 그를 시기하는 정치인들에 의해 젊은이들을 선동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고소당하여 500명의 재판관들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고, 자신에 대한 부당한 고소를 너무나도 도도하게 변명하다 재판관들의 동정을 얻지 못하여 결국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수감되어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 절친한 친구 크리톤으로부터 국외로 도망을 주선하겠다는 권유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사형 당했습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하였는지는 불분명하나, 사회적 정의에 기초한 법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철학자로서 개인의 편익을 위한 도망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법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기희생적 자세를 보여 준 것은 분명합니다.

20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흑인들의 인권 운동이나 베트남 전쟁 시 학생 운동 등에서도 정의와 법의 의미 및 복종 의무 등과 관련하여 그 찬반에 대한 격론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운동들도 결국에서는 자국법 질서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운동가들에 의하여서야 비로소 나름대로 그 결실을 거두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시청 앞 잔디 광장에 몰려나온 시위자들은 정말 우리 사회 내에 있는 여러 부류의 집단들입니다. 노조 연합, 해고 퇴직자, 사회 빈민층, 철거민 대책회의, 지하상가 연합회, 환경단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등등…. 정말 다양한 목소리의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위 방법들이 너무나 흡사한데, 빨간 띠를 머리에 두르고 마치 금방이라도 죽창으로 누구를 찔러 죽일듯한 태세들입니다. 무슨 근거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도 잘 모를 정도로 시끄럽게 꽹과리를 쳐대면서 확성기로 구호를 외칩니다. 다들 비슷한 색깔과 비슷한 글씨체의 선동적인 의상으로 팔을 높이 휘저으면서 구시대의 민주화 운동 당시 데모 가(歌)들을 목소리 높여 불러댑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회정의가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반영하고자 하는 각종 민원의 해결'이 '정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자신들 만의 정의가 있어서 이와 다른 기존의 정의에 기초한 법제도는 무시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지금까지 우리가 독재 권력으로부터 탈피하고자 수많은 희생을 거치면서 쌓아온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발상으로 보입니다. 다수 국민의 의사에 의하여 뽑힌 국민의 대표들이 의견을 모아 결정한 정의와 법은 존중되어야 하고,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면 법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하여야 하는 것이 성숙한 민주 시민사회의 국민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사회 유지를 위하여 정해진 제도와 의견 개진 절차가 있음에도 무조건 거리로 뛰쳐나와 대화와 설득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법질서마저 무시하는 경우라면, 이는 또 다른 이익 집단의 독재이고 이에 대하여는 국가가 침묵하는 다수를 위하여 엄격한 법 집행을 하여야 합니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졌는데, 눈에 안대를 두르고 양손에 각각 저울과 칼을 든 여신입니다. 눈에 안대를 두른 것은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정의를 판단하라는 것이고 저울은 공평하게 정의를 판정하라는 것이며 칼을 든 것은 정의에 위배되는 경우에는 엄정하게 칼로 처단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의 역할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는데 족장, 종교 지도자, 전제 군주 등이 그 역할을 맡았던 시절도 있었고 현재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들이 선출하거나 국민들의 의사가 집결된 법에 의하여 임명된 사람들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그 정의의 여신들은 지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된 정의의 집결체인 법을 제대로 집행하고는 있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아무나 자기 이익에 반한다고 뛰쳐나와 거리를 점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이는 용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의 현실에서는 모두 다 수수방관만 하는 것 같습니다.

대학시절에 저희 법대 건물 앞에는 '정의의 종'이 있었고,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라는 법언을 들으면서 학창 생활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사회가 무너진 다음에 정의를 세우면 소용이 없는 것이고 사회가 무너지지 않게 정의를 세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벌어지는 각종 사회 이익 집단의 무분별한 행동들을 보면 가히 우리 사회가 무너질 지경입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의 정의는 과연 어디에 있고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 본 수필은 본지가 발간한'창공의 빛나는 별 하나'에서 발췌했습니다.

저작권자 © 아이티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