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시집온 새색시의 치마 자락 스치는 소리처럼 창 너머로 봄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마음도 차분해지고 기분도 한결 가벼워집니다. 그런데 비에는 안개비, 실비, 가랑비, 장대비, 장맛비, 폭우 등 그 종류도 참으로 다양하고 많습니다. 여기에 계절 이름을 붙이면 봄비, 여름비, 가을비, 겨울비도 있습니다. 이들은 비로써 독특한 나름대로의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저마다의 아련한 추억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이들 비 중에서 봄비를 특히 좋아합니다. 봄비는 덕지덕지 달라붙은 해묵은 겨울때꼽재기를 말끔히 씻어 내고 긴 긴 기다림에 지친 무료함과 지루함을 잊게 해주는 까닭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겨우내 엄동설한을 참고 견딘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삶의 생기를 불어 넣어 주고꺼져가는 생명체들에게 조차 희망으로 가득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봄비가 오는 날이면 문득 대학 시절, 어느 카페의 주인이었던 누님이 생각납니다. 제가 만난 누님은 저보다 5살 연상이었고 불행하게도 젊은 나이에 홀로된 미망인이었습니다. 누님은 갸름한 얼굴에 조금은 슬퍼 보이는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삼단처럼 검고 긴 머리칼을 곱게 묶어 늘 단아한 모습의 전형적인 한국형 미인상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뭇 사내들의 시기와 질투가 남편을 일찍 여의게 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누님을 한 사람의 여인이 아니라 만인의 여인으로 살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그 누님도 봄비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봄비가 내리는 날이면 누님은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놓고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한없이 편해진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봄비를 좋아했던 까닭에 봄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카페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창가에 홀로 앉아 있는 고독하다 못해 청초한 누님의 모습을 훔쳐보다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곤 하였습니다. 아마 피 끓는 철부지 청년의 짝사랑이었나 봅니다.

누님은 대학 시절, 남편을 처음 만났는데 그 날도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출장을 다녀오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던 날도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도 오늘처럼 봄비가 내릴 때면 누님의 소설 같은 사랑 이야기를 상기하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카페 이름도 봄비를 의미하는'춘우(春雨)'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 누님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지만 봄비가 내리는 날이면 문득문득 그 누님의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사람은 만나면 헤어지고 또 만난다고 하지만 무심한 세월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그렇게 내리는 봄비 속에 휩쓸려 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이제 저 역시 젊음의 피가 용솟음치던 청년에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지나 백발이 성성한 이순(耳順)을 바라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지난 삶에 대해 다소의 아쉬움은 있지만 결코 후회는 없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분수에 넘치는 권력이나 재물을 탐하지도 않았고 그저 순리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앞으로 남은 시간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찰나(刹那)라고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긴 까닭입니다.

계속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저 빗속으로 한없이 걸어가고 싶습니다.

지난날 모든 추억들을 하나 둘 반추하며….

아니 어쩌면 이제는 지난날의 기억들을 하나 둘 지워버리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웠던 과거든, 아팠던 과거든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려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가 늘 기다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 이윤배 조선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

조선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



이윤배는 현재 조선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숭실대학교 대학원 전자계산학과에서 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대학교 정보 과학 대학장 ◆호주 타스마니아 대학교 초청교수 ◆국무총리청소년 보호 위원회 자문위원(인터넷 분과) ◆광주광역시 시정 정책 자문위원 ◆교육부 고등학교 2종 교과서 도서 검정심사위원 ◆광주광역시 및 전라남도 지역 정보화 추진위원 ◆광주교육신문사 회장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보처리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또한 세계적인 인명사전인'The Marquis Who's Who's in the World'에 1999년부터 등재되었으며 1996년 계간'오늘의 문학'신인상(수필부문) 수상으로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전공 저서는'전문가 시스템'외 25종이 있으며, 칼럼 집'어쩌면 해선 안 될 이야기'등 2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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