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 1년 5개월 만에 사업 침체로 업계 우려

컴퓨터월드 2001년 표지
컴퓨터월드 2001년 표지

[아이티데일리]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지식기반 정보화 대국’ 정책이 본격 추진되면서 PC 보급률을 빠르게 높이기 위한 ‘인터넷PC’ 보급 사업이 시작됐다. 당시는 인터넷이라는 개념 자체가 일반 국민들에게는 낯설었고 전화선을 이용하는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 PC통신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PC보급 역시 노트북은 말할 것도 없고 데스크톱 컴퓨터의 보급률마저 낮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시기 발표된 인터넷PC 보급 정책은 가정의 PC 보급률이 70%를 넘기는 데 큰 영향을 미치며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 가입자는 600만 명에 달했으며, 전국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이 안 되는 동네가 없을 만큼 정보 인프라가 성장하게 됐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나라 정보화 확산에 큰 역할을 한 인터넷PC 사업은 한편으로 참여 업체들의 낮은 수익률 등 산업 측면에서의 문제점 또한 안고 있었다.


인터넷PC 사업의 진행과정

1999년까지 국내 PC 시장은 삼성, 삼보 등 대기업이 주도하는 메이커 PC와 용산으로 대표되는 조립PC가 주도했다. 메이커PC의 경우 가격이 200만 원대로 비싸기는 했지만 안정적인 A/S와 메이커에 대한 신뢰도가 강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용산 전자상가에서 부품을 별도로 구입해 만든 조립PC를 주로 사용했다. 메이커 PC에 비해 A/S나 서비스의 질은 떨어지지만 100만 원 안팎의 저렴한 가격에 부품별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게 꾸밀 수 있다는 점이 조립PC의 장점이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PC란 고가의 사치품으로 인식됐고 회사 업무용이나 일부 대학생들, 그리고 연구소의 전유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99년 8월 정보통신부는 ‘사이버코리아21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정부에서 품질을 보증하고 관리하는 100만 원대 이하의 초저가 보급형 PC를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인터넷PC’로 명명된 이 제품은 PC의 보급·확산 등 지식정보산업 활성화를 위해 기획한 초저가 PC였다.

인터넷PC는 △400Mhz 급 이상인 중앙처리장치(CPU)에 △메인 메모리 64MB 이상 △하드디스크 6.4GB 이상 △CD롬 드라이브 40배속 이상 △모뎀 56Kbps △3D 그래픽카드 8MB의 규격을 갖춘 본체와 △스피커 120W 이상 △15인치 모니터가 기본 품목으로 구성됐다. 또한 정부는 목돈 마련이 어려운 서민들을 위해 ‘국민컴퓨터 적금’이라는 상품을 만들었다. 이 상품은 일정액을 6~36개월 동안 납입하는 것으로 이자율은 가입기간에 따라 연 8.8%~10.0%까지 차등 적용했다. 이러한 국민컴퓨터 적금에 가입하고 초기 2회분을 납입하면 컴퓨터를 먼저 제공받을 수 있었다.

우체국에서 제공한 인터넷PC 팸플릿 (출처: 컴퓨터월드, 2001년 8월호)
우체국에서 제공한 인터넷PC 팸플릿 (출처: 컴퓨터월드, 2001년 8월호)

시작부터 어려웠던 인터넷PC 사업

그러나 정부의 1가구 1PC 계획은 시작 전부터 난관에 직면했다. 당시에 국내 PC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삼성, 삼보, LG-IBM, 대우통신 등 4개 메이저 업체가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불참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가형 PC부품 생산업체가 모여 있는 대만에 지진이 일어나 주요부품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두 요인은 대기업의 참여로 인터넷PC의 신뢰성을 높이겠다는 정부 계획에 차질을 줬으며, 모니터를 포함해도 90만 원대면 충분히 수지가 맞을 것으로 예상한 참여 업체에 희생을 강요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에서 실시한 인터넷PC 업체 선정에 50여개 기업이 신청서를 냈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민간심의위원회에서 품질과 서비스 등을 중점 심의해 현대멀티캡, 세진컴퓨터랜드, 주연테크, 현주컴퓨터, 컴마을, 용산전자상가조합, 엘렉스컴퓨터, PC뱅크, 아이돔, 로직스컴퓨터, 성일컴퓨텍, 세지전자 등 12개 업체를 선정했다. 또한 인터넷 이용 확대를 위해 당시 각각 1만 원 수준이었던 가입비와 이용료를 손봤다. 인터넷PC 구매자에 한해 가입비는 면제해 주고, 월 기본 이용료는 4,000원 수준으로 인하한 것이다. 이 사업에 참여한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는 하이텔과 유니텔, 코넷, 나우누리 등 4개사였다.

이렇듯 어렵게 시작한 인터넷PC 사업은 국민컴퓨터적금 시행 한 달 만에 1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인터넷PC가 발매된 99년 10월 말에서 1달 동안의 판매 대수가 9만 8천 대에 이르는 등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인터넷PC의 호황에 자극받은 PC업체들은 앞 다퉈 ‘국민PC’라는 브랜드를 도입해 100만 원 이하의 초저가 PC 모델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일부 업체에서는 본체에 모니터와 프린터, 스캐너를 포함한 패키지 상품을 저가로 공략하는가 하면, AMD 칩셋과 리눅스 운영체제를 채택한 70만 원대 PC본체도 출시됐다. 저가 컴퓨터 시장을 잡기 위한 가격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인터넷PC 심볼. 지구를 상징하는 지구본 모양과 인터넷을 상징하는 ‘@’, 컴퓨터를 상징하는 마우스를 형상화했다. 인터넷PC를 사용해 세계와 연결하고 무한한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 세계를 탐험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출처: 컴퓨터월드, 2001년 8월호)
인터넷PC 심볼. 지구를 상징하는 지구본 모양과 인터넷을 상징하는 ‘@’, 컴퓨터를 상징하는 마우스를 형상화했다. 인터넷PC를 사용해 세계와 연결하고 무한한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 세계를 탐험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출처: 컴퓨터월드, 2001년 8월호)

성급한 출발로 문제점 양산

인터넷PC 사업은 성급하게 시작한 만큼 많은 문제점 또한 발생했다. 일단 초기에 몰린 구입 물량을 업계에서 소화하지 못해 배송이 지연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여기에 신용카드 구입 시 수수료를 소비자에게 부담하게 하고, 설치비를 요구하는 등 수익성을 맞추기 위한 업체들의 파행 운영이 문제가 되면서 사업 시작 50일 만에 현주컴퓨터가 탈락하게 됐다.

1999년 12월부터는 기존의 셀러론보다 뛰어난 펜티엄Ⅲ급 제품이 나왔으며, 2000년 3월 말에는 ‘인터넷 노트북 PC’가 출시됐다. 그러나 인터넷 노트북 PC 사업은 초기부터 물품 공급이 지연되고 일부 제품의 발열 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판매가 부진했다. 결국 판매를 일시 중단한 업체들은 2000년 6월 말 성능 보완이 된 제품을 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하며 이미지 개선에 나섰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7월 20일 세진컴퓨터랜드가 부도 처리됐다. 인터넷PC 시장을 노린 대기업들의 저가공세와 함께 비수기에 접어들면서 급감한 판매량 등으로 인해 업체들의 수익성이 악화된 것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됐다.

사업 시작 1주년을 맞은 10월에는 정보통신정책연구소의 실사 자료를 바탕으로 업체 재조정과 규제 강화 등을 통해 2기 사업체를 출범시키고 정부 주도에서 협회 중심의 민간 이양을 천명하는 등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됐다. 또한 기존 10개 업체에 대기업을 포함한 5개 정도의 업체를 추가해 사업을 강화시켜 나갈 것이라는 대안이 제시됐지만 결국 실행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침내 2000년 11월 들어서는 수익성 악화를 들어 PC뱅크, 용산전자상가협의회, 컴마을, 엘렉스컴퓨터 등이 사업을 포기했고, 2001년에는 성일컴퓨텍이 포기를 선언하며 2001년 8월 기준으로 5개 업체만이 남게 됐다. 판매량 또한 1999년 12월에는 6만 1천 대가 판매될 만큼 호응이 뜨거웠지만, 1년 5개월 후인 2001년 4월에는 겨우 446대의 판매를 기록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2001년 8월 즈음에는 월 200여대의 판매를 기록하며 겨우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인터넷PC 보급실적 (출처: 인터넷PC협회)
인터넷PC 보급실적 (출처: 인터넷PC협회)

가격 경쟁력 상실이 사업 침체의 요인

인터넷PC 사업 초기에는 정보통신부에서 강한 의지를 갖고 강력하게 사업을 추진했다. 우체국을 통한 광고도 많이 하고 날마다 인터넷PC에 대한 기사가 언론을 장식하면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웬만한 애로사항은 정부에서 직접 처리해 업체들이 마음껏 사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2000년 4월 이후 사업을 주도하던 정보통신부 인력들이 하나둘씩 교체되고, 인터넷 협회 또한 정통부 그늘에서 벗어나다 보니 사업을 주도하는 이가 없어졌다.

정통부에서도 적극적인 개입이나 지원을 하지 않았고, 협회 내부에서는 각 업체들의 이익 때문에 의견들이 정리되지 않으면서 혼란이 가중됐다. 이런 와중에 비수기와 경기 하강으로 매출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사양을 업그레이드하고 가격 인하로 사업 활성화를 모색하던 차에 세진컴퓨터랜드 부도라는 악재까지 터진 것이다.

세진컴퓨터랜드의 부도는 중소기업 중심으로 구성된 인터넷PC협회에 대한 고객들의 불신을 만들었다. 세진이 판매한 인터넷PC의 A/S 문제를 놓고 협회와 정통부 사이에 많은 이견이 충돌했다. 협회에서는 정통부에서 부실한 업체를 선정한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책임을 지고 처리하라고 주장했고, 정통부에서는 협회에 가입한 업체의 문제이니 회원사들이 A/S를 하라는 입장이었다. 결국 힘의 논리에 밀린 협회가 세진이 판매한 물량에 대해 사후관리를 하게 됐지만, 이 일로 정통부와 인터넷PC협회의 사이는 벌어지게 됐고 인터넷PC에 대한 국민의 신뢰 역시 하락하게 됐다. 이후 협회는 회원사들마다 의견이 갈라지고, 정통부에서도 다른 사업에 중점을 두게 되면서 인터넷PC 사업은 흐지부지 되고 만다.

이렇게 서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다 보니 사업 자체가 엉성해지게 됐다는 것이 2001년 8월경 관련 업체들의 입장이었다. 사업 1주년을 맞아 중간 평가를 실시하고 사업 개선을 위한 방안으로 사업의 민간 이양, 신규 업체 참여 등을 협회 실무자들이 제안하기도 했지만 논의 과정에서 각자의 목소리에 묻혀 시행되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보증보험의 고자세도 어려움 가중에 한 몫

보증보험도 문제의 한 축으로 지적됐다. 보증보험의 수수료에 대한 것이었다. 초기 사업 시에는 고객의 편의를 위해 서울보증보험에 가입하고, 업체가 계약 기간에 따른 수수료를 납부하기로 했다. 수수료는 평균 2.5%의 요율로 1년 계약 시 1%, 3년 계약 시 3%를 미리 납부하게 돼 있었다. PC 한 대당 가격을 100만 원으로 산출할 때 3년 계약을 기준으로 3만 원을 선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터넷PC의 마진율이 평균 5% 미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3%라는 돈은 업계 입장에서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업계는 이 수수료라도 인하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한 달에 1천 대도 못 파는 마당에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무리였다.

보증보험에 대해 또 다른 불만도 있었다. 보통 소비자들은 처음에 3년을 계약하고 PC를 구입했지만, 대부분이 1년 안에 남은 액수를 상환해 버렸다. 이런 경우 수수료 차액인 2%에 대해 보증 보험 측에서 반환을 해줘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우체국에서 발행하는 서류 등의 절차가 복잡해 실제로 돌려받는 비율이 미미했던 것이다. 우체국에서 서류를 잘 처리해 주기만 하더라도 나머지를 업체 측이 준비하면 되므로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우체국에서 인터넷PC를 담당하는 실무자가 다른 일을 함께 담당하거나 자주 교체되곤 해 실무를 몰라 서류 준비 자체가 되지 않기도 했다. 당시 업체 관계자는 “문의를 몇 번은 해야 한 번쯤 보내 주는 식으로 어려운 실정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사실 우체국 직원의 문제라기보다는 보증보험사 측의 전산화된 자료를 이용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복잡한 절차를 만들어놓고 지킬 것을 고수하는 보증보험 측의 고자세가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비용 문제뿐만 아니라 인터넷PC의 온라인 판매 등 구매 절차를 간소화 하는 측면에서도 보증보험에 필요한 서류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에 차라리 보증보험 없이 신용판매 부담을 업체에서 지는 것으로 사업을 개편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또한 정부에서 구매하는 행망용, 교육용PC에 인터넷PC를 일정 부분 채택해 달라는 것이 업계의 요구였다. 당시 행망용 컴퓨터 시장은 삼성과 삼보 등 대기업이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나머지 중소 업체들이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현주컴퓨터 등 중견기업 등을 뺀 인터넷PC 업계의 점유율은 채 5%도 되지 않는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었다.


정보통신부 “업체들이 분발해야”

하지만 정통부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정부에서는 인터넷PC 사업을 추진하면서 업체의 제안서를 검토해 사업자를 선정했고, 전국 3,600여개의 우체국을 이용한 거래를 할 수 있게 해줬으며, 국민컴퓨터적금까지 만들어 금융 지원을 했으면 할 만큼 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참여 업체들이 판매 초기부터 이어져 온 품질과 서비스 등에 대한 소비자 불만은 해결하지 않고 정부의 더 많은 지원을 바라고 있어, 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업체에 비해 과도한 특혜를 요구하고 있다는 지적도 했다. 행망용 PC와 관련해서도 정통부에서는 이미 사업 초기에 인터넷PC가 정부에 납품이 가능하도록 규정을 변경했으며, 조달청에 협조 공문을 띄운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또한 정부에 납품되는 모든 것은 조달청이 정한 기준과 방식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지, 정통부에서 특정 제품을 사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업체에서 입찰 시에 좀 더 좋은 제품으로 경쟁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정보통신부의 지원이 없어서 안 된다는 것은 틀린 말이라고 정통부 측은 선을 그었다. 다만 민간 이양이나 신규 업체 참여와 관련해서는 내부에서 충분한 검토를 걸쳐 시행할 일이기 때문에 “논의 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넷PC협회 “회원사들의 단결이 대안”

인터넷PC 협회의 입장은 대체로 정부와 사업자들의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협회에서 우선 문제로 삼는 것은 회원사들의 의견 통일에 대한 부분이었다. 시장 경기가 좋을 때는 협회의 결정도 무시하고 기업들이 서로 경쟁을 벌여 물의를 일으키더니, 사업이 힘들어지니 서로 나 몰라라 한다는 게 협회 측 주장이었다. 또한 어떤 제안을 하더라도 각 업체들이 스스로의 이익에만 매몰돼 제대로 결정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꼬집었다.

어쨌든 당시 협회는 나름대로 대안을 찾고자 했다. 정부에서 구축한 이포스트(www.epost.go.kr)를 B2B사이트로 활용해 부품 구매 등에 대한 공동구매를 추진함으로써 부품 단가를 낮추려는 시도를 했으며, 외국 업체 등과의 판로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당시 협회는 “이제라도 업체들이 하나로 모여 그동안 구축된 인프라를 통합해 잘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회원사들이 대리점과 우체국 판매의 비율을 적절히 조절해 충돌을 줄이고, 분산돼 있는 A/S망의 공동사용 등을 추진한다면 대기업PC와의 경쟁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정부의 인터넷PC 사업은 PC의 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사진은 인터넷PC 설명서를 보는 사용자.
정부의 인터넷PC 사업은 PC의 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사진은 인터넷PC 설명서를 보는 사용자.

인터넷PC 사업이 남긴 것

이렇듯 말 많았던 인터넷PC 사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국내 정보화에 미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인터넷PC 사업이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우선 PC 가격의 거품을 제거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저렴한 인터넷PC로 인해 ‘PC는 고가제품’, ‘PC는 특별한 사람만 쓰는 것’이라는 인식이 무너져 국내 PC시장이 활성화된 것이다. 특히 대기업들이 인터넷PC 시장을 겨냥, 저가 제품을 잇달아 출시하면서 국내 PC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져 국민들이 보다 적은 부담으로 구입할 수 있는 PC의 선택 폭이 넓어졌다.

우체국을 통한 전국 판매로 대도시까지 나와야 PC를 구매할 수 있었던 정보화 소외지역에 PC공급을 늘려 정보화 격차를 줄이는 역할도 수행했다. 또한 대기업 위주였던 당시 PC시장에 인터넷PC 공급업체로 중소업체들을 선정, 이들이 시장에서 인지도를 높이고 자생력을 갖추는 데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밖에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의 기반을 제공한 것과 관련해 소프트웨어 및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발달 계기를 마련하는 등 많은 성과를 남겼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30% 이상 됐던 마진율이 10% 이하로 떨어지면서 체질 개선이 강제로 진행됐고, 아울러 수익 모델의 다양화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업체는 시장에서 사라지게 됐다.

실제로 2001년 8월을 기준으로 인터넷PC 사업에 참여했다가 그만 둔 7개 업체 중 3개 업체가 이미 도산했으며, 2개 업체는 다른 분야로 전업하는 등 심각한 변화를 보였다. 이와 함께 부품 단가를 줄이기 위해 저가 외산 부품을 쓰다 보니 부품 산업의 대외 의존도를 심화하는 등의 부작용도 있었다. 다만 이는 인터넷PC 사업이 남긴 문제라기보다는 단기간의 이익을 위해 부품 개발을 외면한 채 외산 부품에 의존한 업체들의 잘못이 크다는 평가였다.

한국의 컴퓨터 산업에 부흥기를 만들고, 국민들에게 PC를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터넷PC 사업은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경기도 안 좋고 잘 팔리지도 않으니 이제는 사업을 접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다만 사업의 문제점이 여러 가지 지목된 만큼,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되고는 있었다. 어떻게든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어야 하며, 지금의 사업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에 당시 일부 업계는 인터넷PC 사업을 추진할 공기업을 설립하고 공공재 형식으로 저렴한 인터넷PC를 만들어 공급함으로써 PC 보급률을 확대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정부쪽 반응은 간단했다. 더 이상 정부지원을 바라지 말고 업체들 자체적으로 기술과 서비스를 개발해 질을 향상시키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제 인터넷PC는 제 역할을 다 했으니 사업 자체를 종료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001년 여름, 인터넷PC 사업은 생사기로에 놓였고 업계는 다음 행보를 주목하고 있었다.

저작권자 © 아이티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