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AI 스타트업 생태계 뿌리내린다…AI 바람 타고 ‘혁신 아이콘’ 부상

2025-10-20     조민수 기자
사진=픽사베이

[아이티데일리] 유럽은 오랫동안 스타트업 생태계의 불모지였다. 음식 배달 등 제한적인 부문을 제외한 온라인 플랫폼은 대부분 미국과 중국 등의 빅테크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역사와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적인 특성도 스타트업 생태계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었다.

그러던 유럽이 최근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유럽의 혁신 생태계는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점점 더 많은 스타트업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향후 경제적 번영을 이끌고 정의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AI이다. 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지정학적 위기에 대응한 방위기술도 강세를 보인다.

크런치베이스 뉴스에 따르면 올해 3분기 유럽 벤처투자 자금 중 약 40%가 AI 관련 스타트업에 투자됐다. 피치북 보고서에서는 2024년 유럽의 AI 기업들이 약 130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미국 등에 비해 절대적인 투자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AI 산업이 유럽 전체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유럽은 스타트업이 성장하기에 높은 벽이 존재한다. 스타트업들이 성장 단계에 이르면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다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유럽의 벤처캐피털(VC)은 대형 투자에 대해 위험 회피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 결과 유럽 스타트업들은 성장 단계에서 미국이나 아시아 등지의 글로벌 투자자들에게서 자금을 의존하게 되고, 본거지 또는 비즈니스의 중심을 유럽에서 역외로 옮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글로벌 초기 단계 VC인 앤틀러(Antler)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유럽의 스타트업 문화가 전반적으로 활성화되고 있다’고 밝혀 주목된다고 포브스지가 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이후 유럽에서 설립된 14개 기업이 이미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지위로 올라섰으며, 유니콘으로 발돋움하는데 평균 설립 2년 정도가 걸렸다.

보고서는 또 이들 유니콘 중 3분의 2는 글로벌 VC가 아닌 유럽 내 VC로부터 주로 투자를 받았다는 점을 큰 변화로 꼽았다. 이는 유럽의 투자자들이 역내 스타트업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는데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힌다는 해석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유럽 혁신 생태계의 본격적인 도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보고서 책임자인 크리스토프 클링크는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역내 투자가 늘기는 하지만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자금 규모에 비하면 여전히 많이 적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런 한계 속에서 유럽의 스타트업이 돌파구로 모색한 것은 ‘실행 중심’의 사고방식이라고 분석했다. 자금이 풍족하지 않기 때문에, 대신 제품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시장에 내놓는 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AI다. AI는 거의 완벽하게 글로벌 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공평한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AI 도구 덕분에 더 짧은 시간에 더 나은 제품 또는 상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자본이 부족한 유럽 기업도 대형 경쟁사와 맞설 수 있게 됐다.

AI 그 자체를 비즈니스 모델로 하는 스타트업은 물론, AI를 활용해 상품을 개발하는 문화가 새로이 형성된 것이다. 유럽의 투자자들은 빠르게 성장하는 유럽 스타트업의 성공 사례를 보며 후기 단계 투자에도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스타트업을 꿈꾸는 유럽의 예비 사업가들을 고취시키고 있다.

앤틀러에 따르면 현재의 유럽 스타트업들은 대부분 AI 기반 솔루션을 개발하거나 AI 기술을 활용해 제품 개발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이미 글로벌 AI 기업으로 발돋움한 미스트랄이나 일레븐랩스 등은 AI 분야의 대표적인 유럽 간판 기업으로 꼽힌다. 헬싱은 방위기술, 러버블은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빠르게 성장 중이다.

그러나 유럽 스타트업에게 부여된 여건은 녹녹치 않다. 유럽은 연합체 성격을 띄고 있지만 아직 완전한 단일 시장이 아니다. 회원국마다 각각 다른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기업 운영을 규정하는 법과 제도는 국가별로 다르며, 주식 소유권이나 법인 설립 규칙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AI 덕분에 시장 진입 속도가 빨라졌지만, 경쟁국들도 같은 기술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 결국 유럽이 AI 혁신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법적 조화, 자금 규모, 실행 속도 등 여러 구조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찬 것은 팩트다. 혁신과 함께 경제사회 구조와 문화까지 바꿀 동력으로 성장할지 지켜볼 일이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변혁이 순방향으로 진행된다면 미국과 중국 중심의 G2 경제가 미국, 중국, 유럽연합의 G3로 재편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실제로 유럽연합은 그걸 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