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한국을 일컬어 ‘IT 강국’이라 부르니 그는 행복한 공직자였다.”
현재 LG데이콤의 부회장으로 있는 정홍식이란 이름 석자는 웬만한 경력을 지닌 국내 정보통신 업계 인사라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현직 기업인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의 IT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정책자로서의 그의 이름은 동시대에 파트너로 일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세월의 격을 두고 있는 후인들 사이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인물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그가 최근 ‘한국 IT정책 20년’이란 책을 펴냈다.
1980년대를 청와대 경제비서실 과학담당비서관실에서, 그리고 1990년대를 정보통신부에서 20여년의 세월을 온통 IT정책에 파묻혀 살아온 그의 공직자로서의 여정이 기록된 책이다.
저자는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 근무했으며 그 후 정보통신부에 몸담아 98년 차관직을 끝으로 관계를 떠났다.
저자 정홍식은 자신의 30여년 공직 생활 중 무려 20여년을 일관되게 IT정책자로서 봉직해왔다는 유례없는 이력을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이력은 오늘날 세계가 우리나라를 ‘IT강국’으로 부르기까지의 거의 모든 정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는 ‘한국의 IT 정책 20년’을 거침없이 피력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적소유권자라는 영예를 얻기에 충분하다.
우리나라는 90년대 중반, 그러니까 WTO가 출범하고 OECD국에 가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국가 산업 경쟁력 강화’에 관한한 정부의 역할이 지대했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각 산업분야의 대외 경쟁력 확보가 절실했고, 총체적 국가 산업전략을 어떻게 펼치느냐 하는 문제는 시기적으로 더없이 중차대한 과제였다. 이런 과제는 턱없이 부족한 국가 자원을 얼마나 슬기롭게 운용하는가와 맞물려 있었기에 당시 정부 정책자들의 탁월한 식견과 투철한 소명의식을 필요로 했다.
정홍식의 ‘한국 IT 정책 20년’은 당시 IT 관련 정책 담당자들이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얼마나 고심을 했고, 어떤 철학과 전략을 바탕으로 국가의 미래를 건 사업들을 전개했는지 생생하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돼 있다. 1․2․3부는 저자가 관여했던 정책과 프로젝트를, 4부에서는 개인적인 회고와 후배 공직자를 위한 조언, 그리고 당시 함께 일했던 몇몇 동료들의 이야기를 ‘IT 해방동이'라는 표현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1․2․3부를 통해 소개한 정책과 사업은 1980년대 초반의 일감 찾아주기 운동에서부터 반도체와 컴퓨터 및 전자교환기의 개발,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정보통신부 신설, 초고속정보통신 기반 구축, 통신사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본 정책방향 수립, PCS 서비스 무선 접속방식의 CDMA 확정, WTO 기본통신협상 타결, 정보통신산업 발전 종합대책 등 20여 개의 정책과 사업들이 소개돼 있다. '전산망 보급 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 '정보화촉진 기본법' 등의 입법 작업과 정보화촉진기본계획에 이어 정통부 정책의 교과서랄 수 있는 정보사회종합대책도 실려 있다.
이 내용들은 사실상 1980년대와 1990년대 대한민국이 준비하여 추진하고 땀을 흘렸던 IT의 거의 모든 이슈와 정책이다. 이것들은 또한 저자의 손을 거쳐 구체화된 정책들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말을 아꼈다. 자신이 그때그때 기록했던 수십 권의 노트와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건조하게 기술했다.
개인적인 회고 성격이 강한 4부에서조차도 약간의 숨겨진 이야기나 에피소드가 들어 있긴 하지만 객관적 사실 증명과 진지한 그의 소견 발표로 일관하고 있다. 독자를 자극시킬 만한 흥미위주의 영웅담 따윈 아예 없다.
그렇다고 이 책이 딱딱하게 자료 정리로 끝냈다는 게 아니다. 비록 자료 정리 양식을 채택했지만 이 책은 끝까지 다 읽은 독자로 하여금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물이 스며 오르는 듯한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그 감동의 진원은 투철한 국가관으로 열정적으로 살아온 한 공직자의 삶을 만난데서 비롯된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IT 발전을 위해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자세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해온 수많은 IT 가족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서 아직 현장에 남아 우리나라 IT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전하는 충심(衷心)을 이 책의 곳곳에 담아내고 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오늘날 경제 성장의 주역으로서 과거정권세력 보다는 그 당시 봉직했던 공무원들을 애써 치켜세운 바 있다. 설령 어떤 정치적 의도가 담겨져 있을지라도 소신있게 일하는 공무원을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액면 그대로 노대통령의 평가에 동의할 것이다. 80년대와 90년대에 기자와 부대끼며 지냈던 저자를 비롯 특히 IT 관련 부처의 상당수 공직자들은 노대통령의 치하를 들을 만 했다.
결국 이 책의 궁긍적 가치는 공직자들이 ‘복지부동’이란 치욕적인 굴레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어떤 정치적 환경에도 개의치 않고, 소신과 열정이 범벅이 돼 미친 듯이 일했을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그리고 그 보람이 역사속에서 영원히 가슴벅차게 살아남는다는 것을 역설해주는 데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를 아는 많은 지인들은 IT라는 한 주제를 품고 20여년의 긴 씨름을 할 수 있었던 점, 그리고 그 노력이 지금 현재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성공의 결실(IT 강국)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행복한 공직자 였다”고 입을 모은다. 그 자신도 이 책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공직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백전호 논설위원
제목: 한국 IT 정책 20년
저자: 정 홍 식
발행처: 전자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