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역사는 우리의 분명한 역사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국사책에서마저 소홀하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신채호 선생이 발해에 대해 언급하셨다지만 우리 국민으로부터 주목을 받기는커녕 배척되고 말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학자들에 의해 발해는 무시된 것이다. 백년 전만이 아니다. 고려 때, 왕의 명을 받고 우리 역사를 쓴 김부식은 신라 중심의 역사만 기술했을 뿐 발해는 취급조차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경주 김 씨, 김부식은 자기가 쓴 '삼국사기'를 내놓을 무렵 자기 것만 놔두고 당시의 모든 역사서를 불태웠다. 우리나라의 분서갱유는 중국과 달리 한 정치적 역사가의 사욕에 의해 벌어졌던 게다. 그 때 없어진 우리의 또 다른 역사는 '고기'니 구전 등으로 내려오면서 전통역사가 아닌 '그랬었더라'라는 역사의 변죽에 머물렀다.
정통한 소식통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뿐으로 믿어야 했다. 일연의 '삼국유사'도 종종 인용되긴 하지만 일연이 중이라는 이유로 '삼국사기'만큼 비중 있게 취급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최근 들어 '고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지만 일부 계층이나 재미있는 옛 얘깃거리쯤으로 볼뿐 정통역사로 인식하며 관심을 갖는 우리 국민은 적다.
그러나 이러한 '고기'나 구전에 자랑으로 삼을만한 우리 조상과 역사가 더 가득하다. 읽어보면 말도 되지 않는 그리스나 로마 신화를 베스트셀러에 올려놓고 거기 나오는 사람인지 동물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기상천외의 신들의 그 긴 이름들을 달달 외우고 그걸 자랑으로 여기는 게 우리 국민이지만 실제 우리의 신화나 역사에 대해선 무관심에 가까운 게 사실이잖은가? 남의 것이나 허상의 것에는 난리와 호들갑을 떨면서도 우리 것이나 실제상황에 대해선 무감각해 하는 우리 언론과 국민, 이런 현실을 이번 발해뗏목탐사에서 다시 본다.
천 3백년 전 우리의 조상이자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은 발해인들의 해상무역의 길을 따라 가보는 발해뗏목탐사가-이렇게 말을 하면 당사자에겐 욕이 될지 모르나-시골촌놈 같이 생긴 토종 한국인 한 사람의 의기로 진행되고 있었다.
7년 전, 시골촌놈과 같은 토종 한국인보다 더 어린 네 명의 젊은이들이 천 3백년 동안 끊긴 항로를 개척한다며 전세금을 다 털어 모은 8천만 원으로 탐사항해를 실천에 옮겼으나 목적지인 일본땅을 지척에 두고 항해 24일만에 일본 근해의 암초에 좌초되어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4일 함께 항해한 뗏목을 저버릴 수가 없었기에 뗏목과 자기 몸들을 줄로 묶어 어떻게든 뗏목도 살려내고자 했다. 24일간 동고동락한 뗏목은 상징이자 실체였다. 바로 그것은 발해요 우리가 스스로 잊어버린 역사였기 때문이다. 끝내 그들 네 젊은이들은 뗏목과 함께 24일간의 항해를 마쳐야 했다. 이번 발해뗏목탐사대의 방의천 대장의 말을 잠시 들어본다.
"그들의 탐사는 탐험의 경험으로 보아 성공한 겁니다. 단지 그들이 모두 죽음을 맞아 실패로 보였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이번 탐사는 첫 탐사대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기상을 이어가는 2차 탐사입니다. 우리는 발해의 정신을 이렇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들 기억하리라. 당시 신문사에 근무하던 나부터도 제1차 발해뗏목탐사대의 죽음만을 기억한다. 그들의 출발이나 그들의 도전정신, 그리고 자랑스런 우리 역사의 맥을 이어가려는 의기는 죽음이란 쇼킹 앞에 묻혀지고 말았다. 모든 언론들은 죽음만을 보도하며 실패로 그들의 정신을 짓밟고 말았다. 그리고 또 잊혀졌다. 그러나 도저히 잊을 수 없었던 자가 있었다. 촌놈 같이 생긴, 적지도 않은 나이인 40대 토종 한국인이다. 그 후, 7년. 또 그 대를 이어가겠다며 카페를 판 돈, 전 재산인 7천5백만 원으로 탐사 재도전에 들어갔지만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시골 촌놈 같은 토종 한국인, 방의천 대장의 말을 또 들어본다. 동해바다로 막 출항하려는 순간의 그의 감회다.
"출감하는 기분입니다."
가슴이 떨린다거나 희망에 부풀어있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건만 전혀 엉뚱한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출감이라니? 다시 들어본다.
"이 일이 어디 7년이나 걸릴 일입니까? 정부의 관련 부처에선 처음 있는 일이라며 난색을 표명하더니 다그치자 오히려 훼방을 놓는 기분이 들더군요. 무슨 또라이 같은 짓거리냐 이거지요. 상식적으로 보면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도움은커녕 하루에도 수십 번, 어떤 적은 하루에 예순 번을 넘게 전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별 내용도 없었어요. 한참 뗏목을 제작하고 있는데 직접 나와보지도 않고 전화질로만 통제하는 겁니다. 또 정부관련기관이 한 두갭니까? 이래가지고 진취적 기상이니 도전정신이니 하는 걸 이 땅에서 어찌 시도라도 해볼 수가 있겠느냐고요. 이번 탐사는 발해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우리 조상의 진보적인 얼을 본받자는 데에 의미가 있었지만 진행 중 하나가 더 붙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안일무사, 대충주의, 복지부동을 깨는 것입니다. 7년은 이것과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탐사에 온 정신을 빼앗겨야 하는데 얼토당토않은 일에 진을 따 빼앗기고 만 거지요."
어찌됐든 이렇게 어렵사리 출발을 하게 되었다. 강원도 고성 거진항에서 뗏목이 출발지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옆에 있어보니 정말 가관도 아니다. 연신 전화가 걸려오는데 해경과 해군에서였다. 바로 옆에 두고도 나와 보기는커녕 전화질뿐이다. 동해 바다로 인도를 한다거나 인도 의사조차 타진해 오지 않는다. 언제 떠나느냐만 전화로 묻는다. 이럴 즈음 항해 최종 도착지인 일본 니이카타현에선 자기네 영역(일본 해역)에 들어오면 자기들이 도와줄 것이 뭐냐고 물어오고 있었다. 대원 한 명의 얘길 직접 들어본다.
"우리나라 정부 쪽 관리의 전화와 일본 지방정부의 관리의 전화는 듣기에도 전혀 다르게 들렸습니다. 느낌이란 게 있잖습니까? 한국정부의 전화는 간섭으로 들렸고 일본정부의 목소리는 관심이었습니다."
이들 발해뗏목탐사대의 대원 모두는 우리 국민 어느 누구보다도 일본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질 않다. 오히려 일본 땅에 가서 본때를 보여준다고 벼르는 사람들이었다. 항해 중 독도를 지나며 독도는 분명한 우리 땅임을 천명하며 일본에게 알린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지역 방송국에서 나온 몇 사람과 대원의 친지들, 그리고 거진 주민 몇 명만이 참석한 조촐한 출항이었다. 종이신문이든 인터넷 신문이든 그리고 방송의 어느 뉴스팀도 취재하는 데가 없었다. 뗏목에 걸려 있는 작은 깃발을 눈여겨봐도 신문이든 방송이든 인터넷이든 우리나라의 메이저는 하나도 없었다. 다시 방의천 대장의 말을 더 들어본다.
"저기 이 늦은 밤, 이렇게 찬 바람이 부는데도 등대 앞까지 나와서 우리들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해 주는 저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많은 걸 바란 적이 없습니다. 바로 저 힘이면 되지 않겠어요?"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때다.
'우리나란 아직 멀었다는 것'과 '이러니 우리나라엔 아직 희망이 있다'는 두 마음.
옛 우리 발해 선조들이 늘상 건너왔던 것처럼 당시 우리땅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 버린 러시아를 출발하여 그 작은 뗏목이 매서운 겨울파도와 북서풍바람을 가르며 우리 바다 동해로 진입한 지 사흘째, 사람 몇 키를 넘는 거센 겨울파도를 결국 넘지 못하고 통신이 두절되고 말았다. 그 뒤 사흘만에 뗏목이 발견되고 대원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망망대해의 한 평 반 남짓한 뗏목에 몸을 얹었던 네 명의 대원을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그들에게 당장의 두려움은 잃을까 모르는 목숨이요 가족이지만 이 두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은 바로 며칠 전 밤늦게까지 등대 옆까지 나와 자기네들을 전송해준 따뜻한 손길일 것이요 뗏목 위에 팔락이며 항해를 격려, 독려해준 작은 깃발들일 것이다. 방 대장의 말을 한번 더 들어본다. "비록 몸은 우리 네 명이 떠나지만 마음을 함께 하는 모든 우리 국민들이 이 뗏목 위에 다 올라와 있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대신해서 잘 다녀오겠습니다."
조촐하게 거진항을 떠났지만 그들이 돌아올 한달 뒤엔 더 많은 우리들이 더불어 어깨동무하며 어우러져서 환호할 수 있길 소망했지만 소망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원은 뗏목 아닌 해군함을 타고 목적지인 일본 아닌 출발지인 우리 땅으로 돌아와야 했다. 출발 땐 별 관심이 없던 언론들이 실종했다며 호들갑이었다. 탐사실패라고도 한다. 무사히 돌아온 방 대장 등 대원들은 몸을 추스른 뒤 재도전할 것을 국민에게 약속을 했다. 그리고 믿어준 우리 국민에게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 땅의 발해 역사가 끊긴 지 천 3백년. 거의 아무 도움 없이 천 3백년만에 이를 이어나가 보겠다고 나선 그저 평범한 서민들이 7년 전엔 네 명 모두 목숨을 잃었고 이번에도 끝내 뜻을 이루진 못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천 3백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발해의 맥을 이어왔더라면 탐사가 이처럼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두 번에 걸친 발해뗏목탐사가 실패라고 한다면 실패의 주범은 스스로 발해의 맥을 끊은 우리의 조상이요 현재의 우리네들이지 이를 이어가고자 했던 발해탐사대원들의 실패는 결코 아니다. 방 대장은 재도전한다고 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시골 촌놈 같이 생긴 방 대장은 다시 제 목숨을 내놓겠다고 한다. 이런 투혼이 있는 한 발해뗏목탐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더욱이 실패하지도 않았다. 현재진행형의 자랑스런 우리 역사 찾아가기요 이어가기다. 국민은 이들을 다시 격려함으로서 자랑스런 역사잇기에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이들에게 더 힘을 보태줘야 한다.
저작권자 © 아이티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