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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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에 올라 보니
이성계가 임금 같지 않은 임금으로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즉위식을 가진 불과 며칠 뒤, 백성들에게 이런 교서를 내렸다.
「국호는 비록 그대로 고려라 하지만 이제부터는 유신(維新)이 되었다. ......」
이 후 정권을 완전 장악한 이성계는 중국(명나라)에 사신(한상질)까지 보내 나라 이름을 정해줄 것을 요청, 결국 '조선'이란 국호를 얻었다. 조선 5백년의 시작이다. 마치 박정희나 전두환이 정권을 총부리로 잡고난 뒤 미국 순방에 오르는 요즘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역시 정권장악 수순에 따라 1등, 2등, 3등 개국공신이 가려졌고 공신들을 모아 대 연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 설매라는 기생도 불려왔다 한다. 고려 때부터 노래와 춤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기생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최고 잘 나가는 연예인쯤으로 생각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 날은 특별한 날(이성계 천하를 세상에 공표하는 날)로 당시 서울인 개경뿐만 아니라 전국 유명 기생들이 다 초청되었다고 전한다. 이 또한 연예공연장으로 변하는 작금의 국가 행사와 다를 게 없다. 단지 TV중계만 안 될 뿐이다. 술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기생들을 옆구리에 끼고 도는 치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 날은 특별한 날로, '다들 개국을 기뻐하며 하는 짓이려니'하고 이러한 무치한 행동도 눈 감아줬다. 아니 이성계 일파들은 이를 더 반겨, 기생에게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명령도 내렸다 한다.
둘둘 짝짝, 기생과 공신들은 짝을 맞추기 시작했다. 가장 인기가 있던 설매는 전 시중이었던 원로재상이 먼저 찜을 해뒀기 때문에 언감생심, 어느 누구도 감히 눈길조차 줄 수가 없었다. 끗발로 하룻밤 재색을 얻은 노(老)재상은 술이 머리까지 오르자 노망인지 어쨌든 솔직해졌다.
"설매, 너는 듣자 하니 이 놈하고도 붙어 좋아지내고 저 놈하고도 엉켜 잘도 지낸다던데 사실이더냐?"
설매가 거리낌 없이,
"그러하오이다."
대답하니, 노 재상 왈,
"몹쓸 망할 년. 아무리 기생이로서니 네 년은 정조도 없구나. 잘 됐구나. 비록 몸은 늙었지만 오늘 밤은 나와 놀도록 하렷다."
설매는 눈 한번 깜짝 않고 '좋습니다.' 허락하며 말하길,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하며 이 놈도 좋고 저 놈도 좋아해야 할 천한 팔자인 걸 낸들 무슨 권한이야 있겠어요. 왕씨의 정승 몸이면 어떻고 이씨의 정승 몸이면 어떠하냐 이 말이지요. 이는 필시 어제는 왕씨의 정승 노릇하고 오늘은 이씨의 정승 노릇을 해야 하는 여기 모여 계신 대신들과 무어 다를 게 없는 거지요."
지조 없는 늙은 재상이라 한들, 술에 거나하게 취한 몸이라 한들 기생의 이 한마디에 붉히지 않을 만큼 두꺼운 얼굴을 가지지는 못했다. 옆 자리에 앉은 얍삽한 젊은 공신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어 호령으로 노 재상에 아부를 떨었다.
"네 이 년, 감히 이 자리가 어디라고 주둥이 질이더냐? 당장 이 년을 끌어 내거라."
주변 눈치를 살피며 좌중이 떠나갈 만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약아빠진 아부아첨질이었다. 이를 가소롭게 여긴 설매는 목소리를 오히려 더 다소곳하며 이르기를,
"나는 천한 기생으로 태어나 정조를 지키지 못하오만, 귀한 몸으로 세상에 난 그대들은 어찌하여 절조가 천하디 천한 이 기생만도 못하옵니까. 내 얼굴은 겸연쩍을 줄은 알지만 당신들의 표정엔 염치마저 없구려."
지조 없는 정치적 타협이 부끄러워서였을까. 설매의 충고에 감복해서였을까. 아님, 고작 기생 계집을 상대하려니 소위 쪽이 팔려서였을까, 연회는 탄식의 소리와 함께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민심이 이러하자 이성계는 천도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개성의 운이 다 되었다느니 한양이 길지(吉地)라느니, 또는 행정과 교통의 요지로 옮긴다는 갖은 억지 명목을 만들어 한양 천도를 계획하고 지금의 경복궁을 수 개월 만에 짓고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을 잇는 성곽을 1년도 채 되지 않아 다 지어야 했다. 그만큼 천도를 서둘렀다는 말이다. 도망치듯 수도를 옮겨야 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지금의 한양, 바로 서울은 정도전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도읍지를 정한 이도, 나라를 다스려야 할 임금의 궁궐이나 천년도읍을 내다보며 지은 종묘와 사직을 건설한 이도 역시 정도전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궁궐을 짓고 궁마다의 이름을 직접 지어 임금에게 바쳤고 도성을 쌓은 뒤 성문의 이름도 정도전이 손수 지어 임금에게 올렸다.
경복궁, 광화문, 숭례문, 흥인문 등등 모두 6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정도전은 정치가였지만 도시계획자이기도 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올라가 궁의 위치와 성의 둘레를 가늠했다는 인왕산에 일부러 발품을 팔아 오르는 길은 서울의 역사를 돌아보는 길이요, 정도전의 인생역전을 더듬어보는 길이기도 하다.
부암동사무소 옆을 끼고 치마바위를 돌아 인왕산 정상에 오르자, 서울의 중심부인 한양 땅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인왕산 왼쪽으로 북악산 능선(복원된 성터가 보인다)과 더 멀리 동대문(흥인문)쪽 이화동,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남산 타워와 앉아 있는 인왕산 정상의 발아래를 동그란 원을 이어 그리니 옛 한양 땅이 잡힌다. 그 안에 경복궁이, 창덕궁이, 덕수궁이 모여 있다. 옛 한양은 참으로 좁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왕산에 올라 옛 한양 땅을 그려 놓고 보니 정도전의 집터였다는 현 종로구청 자리가 동서남북, 옛 한양의 정 중간 위치에 놓여진 듯하다는 뜻밖의 발견을 한다.
손에 들려 있던 서울 지도를 폈다. 정도전의 집이 한양의 정 가운데는 아니지만 당시 한양의 주요 관공서가 밀집해 있던 지금의 광화문 앞길과 민간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종로통의 중간에 정도전의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연은 아닌 듯해 예사로 흘겨 넘겨보아지질 않는다. 그의 집 위치는 그의 정치적 포부와 적이 맞아떨어지는 면이 많아서다.
정도전은 이성계로부터 조선 건국의 1등 공신으로 추서되었지만, 오히려 이성계를 내세웠을 뿐 조선은 결국 자기가 세웠다는 자부심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실제로 왕권정치를 견제할 왕도정치를 이루고자 했다.
나라가 위태롭고 민심이 바뀌면 왕의 성 씨를 바꿔서라도 왕조를 뒤엎을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의 실천자였던 정도전은 이성계로 그 뜻을 이뤘고 이어 유교적 도의로서 재상이 중심이 되어 왕을 이끌어가고자 했던 왕 중심이 아닌 재상 중심의 정치를 펴려 했다.
권력이 한 사람(왕)에게 쏠리는 것을 견제했다. 세자책봉에서 드러난다.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했다. 방석의 나이는 불과 11살이었다. 그러나, 무소불위의 정도전은 오히려 동지로서 개국에 동참했던 동료 신진사대부들로부터 반감과 질시를 사게 되었고 권력욕에 불타 있던 방원(훗날 태종)에 의해 결국 살해되고 말았다. 5백년 조선사에 정도전은 개국공신에서 역적으로 몰려 불명예의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살해 당시의 장면을 TV사극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용의 눈물>이었던가? TV에 의하면 정도전은 죽임 앞에서 비굴했다. '살려만 주면 방원에게 헌신하겠다.' 했다. 사실은 그러지 않았음을 별로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가 있었지만 TV의 드라마는 역사가 되고 사실이 되어버렸다.
조선왕조실록이 권력을 쥔 자 중심의 사(私)기록임에 주시하면 TV에 보여진 그의 마지막 모습은 조작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겠다는 말이다. 정도전의 가족이나 그의 일파에 대한 어떤 증언도 역사의 기록에 남아있을 리 만무다. 이를 뒤집으면 죽음까지도 비굴하게 남겨둠으로서 정적의 살해를 정당화해야 했던 부류, 즉 결국 왕이 된 태종 이방원에 의해 역사가 편향되게 쓰여졌음을 염두에 두고 보면 정도전의 죽임에 시청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임금인 방원('용'이라 이름하였으니...)이 흘리는 눈물엔 동감하면서도 정도전과 같은 소위 역사기록상의 모사꾼에게 동정을 주는 시청자는 극히 드물었다. 실록만이 역사의 사실이요 권력자의 기록이 역사인 것을 어쩌겠는가. 요즘은 그 몫을 TV드라마가 주도한다. 한심하기 그지없어 걱정스럽다.
하여튼 인왕산에서 내려다보면 정도전의 집터뿐만 아니라 방원의 집터도 한 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통인동, 그러니까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자하문 쪽으로 약 150m 남짓한 대로변에 방원의 집이 있었다 한다. 세종임금이 났다는 그 집터는 지금은 초라한 세종미용실로 바뀌어 있다. 정도전과 방원은 경복궁을 사이로 불과 1km도 되지 않는 지척에 살고 있었다.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밖에 나오지 않는 지척의 이웃이었었다.
이병주 선생은 그의 책, 『길 따라 발 따라』에 다음과 같은 가설을 남기며 우리 역사의 슬픔을 회한했다.
「나는 정도전을 생각하면 태종을 생각하고, 이어 한 무제와 사마천과의 관계를 연상하게 된다. 한 무제는 이미 이름만 남아 있는 위패일 뿐으로, 특히 들먹여본다고 해도 만화 이상으로 더 될 것이 없지만, 사마천은 아직도 감동의 원천으로서 길이 살아 있다. 태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생애는 피로서 물들여진 억센 드라마였을망정, 기껏 한 폭의 만화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렇지가 않다. 그의 억울한 죽음까지 합쳐 아직도 그 존재의 의미를 탐색해야 하는 문제로서의 인물이며 감동적인 문제이다.」

한 무제 수하에 이광리와 이릉이란 장군이 있었다. 두 장군은 흉노족을 치러갔다. 3만 대군을 끌고 전쟁터로 나갔던 이광리는 군사를 다 버리고 도망쳐 돌아왔고,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간 이릉은 끝내 흉노 앞에 항복하고 말았다. 조정 대신들은 모두 이릉의 죄를 물어 이릉의 어머니와 처자들을 옥에 가뒀다. 하지만 사마천은 이릉의 처신을 변호하는 글을 한 무제에게 올린다.
"이릉은 5천명도 안 되는 병들을 거느리고 적의 진지 한 가운데 깊이 들어가 수만 명의 적을 물리쳤습니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적에게도 치명적인 피해를 가했음으로 그는 천하에 떳떳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릉이 자결하지 않은 것에는 나름대로 그의 생각이 있을 줄로 압니다. 그는 꼭 공을 세워 죄를 씻고 태상 앞에 나타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이릉을 변호하던 사마천에게 돌아온 건 한 무제의 형벌이었다. 옥에 갇힌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끝내 중국 고대의 가장 위대한 역사서인 『사기』를 후세에 남겼다.)
이런 연유로 이병주 님도 경복궁을 자주 찾는다 했다. 그는 역시 그의 글에서 정도전이란 인물에 대해 재조명할 필요성과 더 나아가 높은 평가까지 기대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 즉 방원의 난이 실패했다면 조선, 그리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미래는 어찌 되었을까 가정하고 있다. 다시 이병주 님의 가설에 귀 기울여 들어보면,
「정도전의 비참한 죽음은 원대한 포부와 과단성 있는 정치가 이 나라에선 보람을 볼 수가 없다는 운명적인 시사 같기도 하다. 정도전과 세자인 아우 방석을 죽임으로써, 방원은 조선조에 있어서의 왕위의 도의적인 바탕을 허물게 했고, 나아가 왕의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위신을 말살했다고 보아야 한다. 스스로 도의적인 바탕을 허물게 하고 위신을 말살해 버린 왕위에 앉게 된 태종이 역사적으로 만화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 5백년을 돌아보니 조선은, 삼 대를 멀다 하고 벌어진 이 씨 집안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 찬탈의 역사요, 권위를 상실한 왕위 하에 극히 일부 양반들 간 당쟁 파벌 싸움의 연속이지 않았던가. 이를 만화 5백년으로 보았던 것이다.
결국 일본에게 두 차례에 걸쳐 국토를 유린당해야 했다. 임진왜란 7년의 폐해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백 년 동안 이어졌다. 이백년의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에게만 돌아갔다. 전국이 황폐해져 곡식이 자라질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갖은 명목의 세금을 거둬들이며 한양 왕족과 권세가들은 자기 배만 채우며 전쟁 전과 다름없는 향락을 누렸고 당파 싸움은 더 심해져 갔다.
이에 비해 일본은 서양의 선진문물을 수용하며 군사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또 한번 일본은 우리 땅을 짓밟았으니 임진란의 7년보다도 훨씬 더 긴 36년의 치욕의 시작인 한일합방이다. 36년이 지난 1945년, 광복이라지만 어찌 광복을 즐거워만 할 수가 있을까. 우리 힘으로 얻어낸 광복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와 마찬가지로 우리 땅엔 다시 치욕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만 우리 민족으로 바뀌었을 뿐 일본에 빌붙어 빌어먹던, 민족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던 자들이 그대로 모든 권세의 자리를 다 독차지했다. 정치인뿐만이 아니라 군인, 법관, 경찰, 언론 모두가 친일파들이 여전히 득세했다. 그리고 60년...
인왕산에서 내려다보면 경복궁 뒤 청와대도 한눈에 다 들여다보인다. 이성계가 중국 명나라 조정이 찍어준 이름, '조선'이란 이름으로 건국한 이래 6백년을 넘게 한 나라의 수도로 군림하고 있는 과거의 한양과 지금의 서울에 달라진 게 뭣이 있을까?
한양은 이제 한눈엔 다 들일 수 없게 한도 없이 옆으로 더 넓어졌고 단층으로 나지막하던 궁궐이며 집들은 마천루로 인왕산의 정상에 가깝게 끝도 없이 치켜 올라오고 있으니 변하긴 변했지만 이건 다 겉모습일 뿐... 허깨비일 뿐...
인왕산에서 내려다보면 역시 삼성 본관이 아주 잘 보인다. 요즘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삼성의 권세는 당파의 세도가를 훨씬 넘어서는 위력으로 21세기 이 땅의 권세를 과시하듯 한 채가 아닌 여러 채로 서울 한복판에 우뚝 우뚝 서 있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사주인 신문사들-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고층 건물들도 다 내려다보인다.

또 다시, 함께 인왕산에 올라온 『길 따라 발 따라』 말미의 작가의 말을 뒤져본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결국 슬픔을 배우는 노릇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다. 한 마디로 말해 인걸은 간 데 없고 산천만 남은 것이다.… 서울의 도성은 오늘에도 남아 있지만 그것을 쌓은 인민들의 땀과 눈물과 피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긴 듯한 마음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요컨대 흐르는 강물은 없고 이끼가 끼인 조약돌 바닥만 남았다는 얘기로 된다. 또 하나의 불행은 숱한 부분이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충(忠)이 불충(不忠)으로 되고, 선(善)이 불선(不善)으로 되었는가 하면, 충(忠)과 간(奸)의 한계가 분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노골적인 악의가 이른바 정사(正史)를 지배하고 있는 대목들도 있었다.」
떠들썩한 X파일이 조선 시대와 아직도 다를 게 없는 모사, 협잡의 맥을 이어가고 있고, 과거청산은 구린 과거의 잔재들로 인해 과거유지로 덮여지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 어렵게 터져 나온 진실은, 진실을 은폐하며 나라야 어떻게 되든 자기 득만 추구하는 정치나 경제 등 세력들의 담합을 오히려 유도한 꼴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도 국민들은 살기 어렵다고 한탄인데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파란 기와 청와대에선 민심과는 전혀 동떨어진 대 연정이니 연석회의니 하며 지역구도 타파, 민생 챙기기라는 묘한 포장지를 덧씌우고 국민의 시름만 가중시키고,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며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정책은 또 하나의 강남정책으로 서민들을 화나게 하고, 내년 거둬들이겠다는 세금의 내역을 들여다보면 이 또한 힘없는 국민들을 성나게 할 뿐이다.
가진 자의 탈세는 전혀 잡지 못하고 꾸역꾸역 월급에 의존해 사는 다수 국민의 주머니를 터는 데만 혈안이니... 백성에게 국민에게 임진왜란 이후, 한일합방 이후 달라진 게 이 땅에서 뭐가 있단 말인가. 구호만 '문민정부'요, 구색만 '국민의 정부'더니, 이젠 '참여정부'라는 가면으로 국민을 속이려 하고 있질 않은가.
요즘 세간에 들리는 얘기다. 아니 한 출판업자의 한탄의 원망이려니. 책이 팔리지 않는단다. 그 이유를 이렇게 재단하고 있었다.
"책 팔아먹고 사는 난들 책을 사보겠어? 신문이나 텔레비전만 펼치고 틀면 다 소설이요 드라마인 걸 굳이 돈 주고 책을 사보겠느냔 말야. 재벌 총수가 돈을 자동차 뒤 트렁크에 싸 넣어주면 그 돈을 신문사 사장이 대통령이 될 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나눠 건네주는 돈 가방 심부름꾼 행세를 자청하고, 돈이 오고가는 장소가 또 드라마틱하잖아? 백화점 지하 주차장이라? 얼마나 스릴이 있냐고.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바로 소설의 대화체 그대로이고. 한 개가 일억이요 오리발이 현금이라니... 이만한 소설, 요즘 봤어? <다 빈치 코드>로도 이만한 서스펜스는 느끼지 못했으니까.
이러니 어떤 소설가가 글을 더 재미있게 쓸 요량을 할 거며 어떤 출판업자가 이보다 더 재미 쏠쏠한 소설을 찾아낼 수나 있겠느냐 이 말이야.
여기다가 대통령은 뜬금없는 소리만 해대지, 이를 두고 내뱉는 정치권의 반응 역시 선정적이고 자극적이어서 말초적 본능을 얼마나 짜릿하게 하느냔 말야. 인터넷 열고 들어가 봐. 댓글은 완전 시간 죽이기엔 참으로 안성 맞춤이더구만.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코미디가 연속 터져 나오는데 책을 사서 볼 시간이나 있겠느냐고.
더욱이 우리나라 최고의 인물이라는 세종임금께서 일찍이 '책은 인간의 심성을 다스리니 돈으로 사고팔지 못하게 하라'하며 책은 특정인(당시 양반들)의 전유물로 백성의 문맹화에 진작부터 기여하셨으니 우리 국민의 독서량이 늘 전 세계에서 꼴찌일 수밖에.
우리나라에선 이젠 출판으로 돈 벌어먹긴 틀렸어. X파일이 <홍길동전>을 대신하고 연예인의 이혼이나 누드사진이 <춘향전>을 대체하고 있으니... 지금 때가 어느 땐데 한 교수의 발언으로 나라가 들썩이고 검찰총장이 하는 짓이 고작 사표라니...쯧쯧.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냐고. 바로 우리나라야."

이병주 선생은 조선뿐 아니라 작금의 사태에 대해서도 역시 만화의 연속극으로 보겠거니. 집에서 가까운 인왕산이라서 자주 올랐었지만 6백년이 지나도록 달라진 게 없는 세상을 내려 보자니 오히려 가슴만 답답해지고 더욱이 마음만 갑갑해져 그 좋은 동네 뒷동산 오르기가 참으로 꺼려진다.
불현듯, '6백 년 전의 설매는 지금 없는가?' 고개를 돌려 둘러보게 한다.
"나는 천한 기생으로 태어나 정조를 지키지 못하오만, 귀한 몸으로 세상에 난 그대들은 어찌하여 절조가 천하디 천한 이 기생만도 못하옵니까. 내 얼굴은 겸연쩍을 줄은 알지만 당신들의 표정엔 염치마저 없구려."
6백년이 지나도 이 땅엔 설매의 당찬 비아냥이 국민의 한탄으로만 여전하다.
연일 신문들은 소설을 쓰고 있고, 연일 TV 뉴스에선 드라마만 찍어대는 세상. 흥미진진한 소재 제공이 끊이질 않으니, 대통령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는 졸개역의 엑스트라로 자의타의 변장 질이고, 재벌총수는 사설포졸 검사들을 거액으로 유혹해 부패비리의 경호원으로 삼으며 정치인 줄 대기로 자발적 애첩 질이고, 친일 신문들은 사과나 반성은커녕 제 목을 치켜세우고는 오히려 더 떳떳한 듯 눈치껏 푼수 질이다. 이들이 별난 꼴값 질을 다 해대도 아무 탈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라니...
역사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다지만, 이 아수라장 코미디(만화)판에 만약 설매가 다시 등장한다면, 그녀는 어떤 말로 염치없는 이들을 조롱할까?
흐르지 않는 물처럼 흐르지 않는 역사는 인걸, 산천 모두를 다 썩힐 뿐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흐르지를 못하고 그저 눌러 앉아 머물러 있을 뿐이다. 동서남북 산들로 둘러쳐져 들고 나감의 흐름을 막는 한양, 서울처럼 우리의 역사는 정체된 채 안주만하고 있을 뿐이다.
인왕산 아래 서울의 사방이 콱 막혀 답답하고 갑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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