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년? 시간의 빠름을 뜨거운 월드컵축구 열기로 다시 느낀다. 아니, 4년 내내 월드컵이 이 땅을 데워왔던 것 같다. 박찬호가 미국으로 처음 건너갔을 땐 새벽잠을 설치면서까지 온 국민이 그에게 올인했었다. 그때 정치, 경제 등 모든 게 시원치 않으니 이런 말까지 자주 들렸었다. '박찬호, 너밖에 없다' 신나는 일이 없었다는 말이요, 이러니 박찬호의 승리만이 국민의 무거운 마음을 그나마 덜어줄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더니 월드컵축구로 우리는 하나가 된 듯이 보인다. 온통 월드컵축구 얘기다.
그러나, 요즘 내가 만나는 사람들 대다수는 얼굴에 울상이다. 요즘 나와 얘기하며 술 한잔 기울이는 사람들은 또 대개가 입가엔 짜증이다. '또 월드컵이야?'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출판관련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세상을 비틀어보는(비판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라서인지 몰라도 이들의 말은 분명한 근거가 있다. 출판사나 인쇄소는 월드컵축구 이후로 모든 일을 미루고 있단다. 월드컵 때문에 책이 팔리질 않는다는 말이다. 또, '전두환이가 스포츠(세계와 아시아 올림픽 동시 유치)로 국민을 현혹하더니 이젠 국민 스스로가 스포츠에 빠져 버렸으니... 스포츠가 뭐냐고? 국민을 우매(중우정치)하게 만드는 도구의 하나로 정치인들이 오래 전부터 악용하던 것 아니냐고. 국민이 스스로 여기에 빠져 있으니, 이거야 원!' 이렇게 말하는 이들 역시 우리나라 축구 게임이 있으면 TV 앞에 모여 열광하는, 주변의 여느 국민들과 다르지 않다. 이들이 월드컵축구에 비판적 시각을 보이는 이유는, 축구가 싫어서가 아니고 더욱이 8강 진출이 기쁘지 않아서도 아니다. 너무나 지나치다는 것이다.
월드컵에 모두 올인하고 있다는 말로서 하나에만 몰려드는 우리 국민의 편집성 또는 편중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랬다. 지난 한일 월드컵의 최대 수혜자라 말할 수 있는 히딩크마저도 이를 의식한 한 마디 말을 오랜만에 우리나라를 찾아온 그가 공항에서 기자 앞에 이 말을 했었더랬다. 며칠 전 아마 기업 광고를 찍으러 온 듯한데(돈 벌러) 히딩크는 이런 중에도 우리 국민에게 충고의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축구는 축구로서 즐겨라"
국민도 언론도 이의 충고를 흘겼다. 그가 이번에도 우리 축구가 큰 일을 해낼 거라는 말에만 포커스를 맞췄다. 그의 짧은 충고 속엔 역시 월드컵에 대해 몽땅 쏟아 넣는 나라 힘의 낭비? 또는 국민들의 지나친 열정의 후유증도 예상하는 듯했다. 그가 굳이 입국하는 자리에서 왜 이런 초치는 듯한 말을 해야 했을까? 하지만 우린 듣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달콤한 말에만 또 빠져들어 있다. 초치는 소리가 들릴 턱이 없다.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 동시개최가 결정되는 날, 현장에 있던 기자는 일본 기자 등 외국 기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런 말이었다.
'한국은 대통령이 뛰고(월드컵 유치를 위해 온 나라가 뛴다는 말), 일본은 일본축구협회장이 뛴다' 이건 비판이라기보다는 조소로 들렸다. 2005년에서 2006년으로 넘어가는 신년맞이 TV는 2006년을 온통 월드컵축구의 해로 정하고 월드컵 8강 진출을 기원한다는 버라이어티 호화연예쇼를 연출하고 있었다. 상업방송뿐만이 아니다. 전기료에 TV수신료로 2천5백 원이 매달 강제 징수되고 있는 국영방송인 KBS1도 다르지 않았다. 신년을 맞는 같은 시각, 함께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일본은 어떤가 하고 NHK로 채널을 돌려봤다. 조용했다. 차분했다. 일본 각지로 카메라가 향하고 있었고 카메라 앞의 일본 국민은 1년 소망을 얘기하고 있었다. 거의 한 시간을 들어봤지만 월드컵이란 단어는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월드컵축구에만 올인하는 국민을 탓할 수 없다. 참으로 신명나는 일이 주변엔 없다. 박찬호 때부터 지금까지 스포츠만이 닫히고 막힌 국민의 가슴을 그나마 열어줄 수가 있었고 쾌거로 들려오는 스포츠에 가슴이 폭발하고 입과 몸으로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스포츠는 스포츠다. 방송 신문 등 언론은 물론, 정치인들까지 제 본분과 의무를 넘어 호들갑으로 응수하며 스포츠를 상업적으로 이기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난 월드컵야구의 4강 진출 때 병역기피 등 범법자까지도 병역면제라는 발 빠른 정치쇼로, 제대로 좀 살아보려는 상당수 국민의 어깨를 떨구게 했다. 우리의 정상적인 아들들이 간 군에선 별 희한한 사고가 다 일어나고 있고 자살자도 속출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이러니 우리 아이들의 관심은 돈 잘 버는 프로팀이 있는 스포츠 선수가 되거나 연예인이 되는 것이 꿈이라는 말을 거리낌 하나 없이 하고 있질 않는가. 다 돈과 관련된 일이다. 인기종목이 아닌 스포츠인들은 오히려 그 자괴감이 국민들보다도 더하다고 한다.
또 들리는 듯하다. 2002년이었다. 월드컵 축구로 광화문에 몰려들고 있을 때였다. 택시기사다.
'나도 무지 축구를 좋아하지만 도대체 손님이 없어'
출판사나 인쇄소만이 아니다. 어느 장사고 다 안 된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또, 4강 진출에 신화라는 단어를 막 써 먹어도 되는 건가? 고작 우리 국민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왜 스스로 우릴 과소평가하는가 말이다.
한일 월드컵축구의 최대 수혜자가 우리에게 들려준 충고를 우린 이제라도 흘겨 들어서는 안 된다.
'축구는 축구로서 즐겨라'
히딩크의 이 말 한 마디! 이러다가 온 나라가, 국민이 홀리건이 되는 건 아닐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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