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고 무대 쪽으로 나가더니 "민짜 벽이네"하며 영화관을 평하길,

신출귀몰 귀신인가 변화무쌍 도깨빈가.
모양은 사람인데 필시 사람은 아니네.
방금 전 허깨비를 봤음이 분명하다.

한 권력자의 최후의 날을 본 것이라 귀뜸 주니,

映畵가 무언지 榮華가 어떤 건지
알길 없는 이 길손이 맞추긴 맞췄구나.
映畵도 榮華도 지나면 그뿐 허깨빌세.
무상한 줄 알면서도 쫓고 쫓으니 역사는 권력의 기록일 뿐이라며 또 그의 너털웃음을 털어낸다.

칼날 세워 얻은 권력 칼끝으로 무너지고
총 겨눠 뺏은 권세 총탄에 쓰러진다.
당연한 이친 것을 총칼든 자만 모르네.

식당에 들어서자 벽에 써 붙인 저게 뭐냐며 손가락을 가리킨다. 저 중에서 하나 골라 먹으면 된다 했다.

동태찌개 생태찌개 북어국 북어찜
낙지볶음 낙지전골 산낙지 세발낙지
저많은 먹을 것중 하나만 고르라니
오히려 야속하오 오히려 야박하오.

비록 거지지만 공짜로 빌어먹진 않았다며 계산 대신 시 한수를 내놓는다.

풋고추조림 맛깔나네 식당안주인 솜씨런가.
생조개무침 때깔좋네 식당주인 요리런가
고추 조개 우물우물 입속에나 뒤섞네.

성희롱이 될 수 있다며 입을 막으려니 예술을 어느 누가 무슨 수로 막느냐고 되레 호통이 아닌가.

요리가 열 가지니 요씹이요
찬도 열 가지니 찬씹이네
눈에만 진수성찬 먹지 못할 오 입이여.

음담패설에 불현듯 삿갓의 유사한 시가 떠올랐다.

털이 길고 안이 넓으니
타인이 지난 것이 틀림없네.

시인에게 물었다. "이 시에 어느 기생인가 화답을 했다고 전해오던데, 그 기생의 이름은 전해져 오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의 졸렬한 이 시보다 기생의 화답시가 더 재치가 있었습니다." 이 시를 말함이냐며 삿갓이 읊조린다.

뒤뜰에 익은 밤송이는 벌이 안 쏴도 터지고
개울가 버들은 비 안 와도 길게 자라지요.
"시나 읊는 폐족 양반이라지만 내 평생 거지꼴로 살았거늘 번듯한 기생 한번 안아볼 수 있었겠는가."

누군 손을 써서 풀듯이 누군 시로 자급하더이다.

대답이 되느냐고 물어온다. 하며 누가 지었든 아무렴 어떻냔다. 식당에서 나온 동행길은 삿갓 선생이 들러보고 싶다하여 단양 땅으로 틀어졌다. 도담 삼봉이 내려다보이는 석문 위에 오르니,

물도 그대로 삼봉도 그대로
사람만이 그대로가 아니구나.
백만 군인 호령하던 보무당당 한신 장군
기껏 정적 궁중 소인배에 목 베이고
사백년 이어온 고려 엎은 삼봉 선생
고작 방원 못함을 어찌 아니 몰랐을까.

삼봉 선생이란 정도전을 말하며 그의 고향은 충북 단양이다. 단양의 도담 삼봉에서 글을 깨우치기도 했다 전한다. 현재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경국대전' 등 조선의 틀을 마련한 조선개국 1등공신이었다. 이성계의 총애를 받으며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지만 정적인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에 의해 조선개국 7년 되던 해, 방원의 하인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시로 삿갓 선생을 따라 붙으니 절로 시인이 되어간다. 좀 전 보고난 영화평이랄까,

입에는 시바스 리걸 귀에는 엔가
건설조국 외치더니 미제 총에 쓰러질 적
마지막 외마디도 빠가야로 아닐런지.
저작권자 © 아이티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