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내가 무언가 잔뜩 들어 있는 주머니를 내 앞에 털썩 내려 놓으며 물었다. "이게 뭔 줄 아세요?", " 글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나를 싫지 않은 눈 빛으로 흘겨보며 아내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동안 내가 모은 동전들이에요. 또 이 만큼이나 모았네."

언제부터 였을까. 아내가 동전을 모아 지폐로 바꾸고, 바꾼 지폐를 들고 한없이 기뻐하며 아이들에게 용돈으로 주기도 하고, 장을 보러 가기도 했던 때가. 이제는 제법 살만해져 그러지 않아도 될 듯 싶은데, 습관이 되었는지 아내의 동전 모으기는 그렇게 몇 십 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 아내를 닮았는지 아이들 마저도 이제는 훌쩍 커 버린 20대가 되었지만 동전 모으기를 하고 있다. 이들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어쩐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가엽기까지 해서….

아내의 묵직한 동전 주머니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어린 시절, 코 묻은 손으로 아버지께 받았던 동전이 생각났다. 그 당시에는 2,300원도 큰 돈이었는데 통 큰 아버지께서는 소풍가는 큰 아들에게 꼭 500원씩 쥐어 주시곤 하셨다. 그러면 나는 곧 우쭐해져 소풍 가는 길이 마치 천국가는 길과도 같았다. 지금은 과자 한 봉지에 500원이 우스운 시대가 되어 버렸지만 몇 십 년 전의 500원은 나를 최고 부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마법과도 같은 돈이었다.그러나 지금은 코흘리개 어린 아이에게 500원을 줬다간 비웃음을 당하고 말 세상이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런데 '요즈음 아이들은 어렸을 적의 나보다 더 행복할까?', '그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요 속에 살고 있으니…'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설날이 되면 어린 아이들에게 세뱃돈으로 얼마씩 주어야 이 아이들이 나를 좋아 해줄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면서 고민하는 나를 바라볼때마다 여기 저기 굴러 다니는 500원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래도 시골 아이들에게는, 저 멀리 산골에사는 아이들에게는 아직은 이 돈이 크지 않을까? 라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까지 해 보기도 한다.

불현듯 지난 번 길가에서 편지 봉투를 팔고 있던 노인이 떠올랐다. 볼 일이 있어 종로를 지나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길가에는 길 한 켠을 차지하고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이 앉아 봇짐을 풀어 놓은 채 나물도 팔고, 볼펜도 팔고 계셨다. 오랜만에 차를 세워두고 걷는 종로 거리라 나름 그운치를 즐기려 했다. 그런데 오히려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편지 봉투를 팔고 있던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버린 노인이었다. 내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저 정도 연세가 되셨을 텐데…. 갑자기 뭉클한 마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수북한 무언가의 옆에 비뚤 비뚤 힘겹게 써 내려간 글씨였다.

' 봉투 100장에 500원'. 저럴 수가…. 100장에 500원이라니…. 사업을 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계산이되지 않는 장사였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 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봉투 1,000장 주세요."
"아니, 그렇게 많이 사서 뭐하게?"노인의 놀라는 기색이 전혀 싫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신나는 손놀림으로 봉투 열 묶음을 까만 비닐 봉지에 넣어 주면서"오 천원이야"하셨다. 그 주름진, 세월에 거칠어진 손이 뽀얗고 부드러운 내 손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노인의 손을 보자니 또 거칠어진 내 아내의 손도 문득 떠올랐다. 주머니에서 얼른 오천원을 꺼내 노인에게 건네주고 바로 길가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다.

연말이 다가와서인지 백화점은 선물 사는 사람들로 많이 붐비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내와 함께
와서 사고 싶은 것을 골라 보라고 했을 터이지만 이 날은 나도 아내에게 깜짝 선물을 하고 싶었다.
아내가 두 팔 가득 감싸 쥐었던 동전 주머니를 들고 나에게 자랑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 저것 기웃거리다 아내의 손에 맞는 장갑을 하나 골라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정서 상 여성 잡화 코너에 있자니 조금은 쑥스럽기도 해서 뭔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을 곧 바로 사서 나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불현듯 장갑 코너에서 일하던 백화점 직원이 양말 코너에 있던 친구를 부르면서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이것 봐. 너무 예쁘지 않니? 나도 얼른 결혼해서 내 남편이 이런 것 좀 사다 주면 좋겠어. 그러면 하루종일 설거지만 해도 행복할 거 같아.", " 얘는, 그건 좀 너무 소박한 꿈 아냐? 하긴, 난 남자 친구도 없으니 할 말도 없구나."

그래, 저거다. 분명 저 직원은 20대 후반 정도일테니, 저 정도의 디자인이면 충분히 내 아내도 좋아 할게 아닌가. 주춤 거리며 다가가서 그 장갑이 얼마냐고 묻자 할인해서 오 만원이란다. 붉은 와인 빛이 나는 보드라운 세무 장갑이었다. 손등에는 예쁘게 오밀 조밀한 작은 들꽃들이 수 놓아져 있었다. 산골에서 자란 우리 아내도 분명 이런 들꽃들을 보며 자랐을 테지….

"선물 하실 거에요? 분명히 좋아하실 거에요. 예쁘게 포장해 드릴께요."라며 직원 아가씨가 장갑을 살포시 상자에 내려 놓고는 예쁜 리본을 꺼내 정성스럽게 묶었다. 선물을 받아 들고 기뻐할 아내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포장하던 직원이 부러운 듯이 쳐다보며 나에게 잘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 " 고마워요. (분명 아가씨도 좋은 사람 만나서 장갑을 선물 받을 날이 올거에요)"한 손에는 오천 원짜리 봉투 천 장을, 다른 손에는 오만 원짜리 장갑을 들고 돌아오는 길이 마냥 행복
하기만 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오천 원을 주어 행복하게 해 주었는데, 같이 20년을 넘게 함께 살아 온 아내에게 이 정도 선물 하나 못해 주랴. 비록 이제는 내게 500원을 줄 아버지도, 설날 세뱃돈을 주실 친척 어른도 안 계시지만 이제는 내가 베풀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집에 들어서니 아내가 반갑게 맞으며 묻는다. " 그건 뭐에요?"일단 길가에서 만난 노인 얘기를 해 주자 아내가 잘했다며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는 선물이라며 상자를 건네자 금세 아내 얼굴에 함박 웃음꽃이 피어 오른다.

"너무예쁘다."아내는 손에 끼워보기도 했다가 수 놓아진 꽃들을 보기도 하면서 어린애처럼 기뻐한다.

거실 구석에 놓여진 동전 꾸러미가 눈에 들어 온다. 이제 아내는 저 주머니를 가지고 은행에 가서 지폐로 바꾸고 우리 가족을 위해 장을 보거나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겠지. 막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 아내다. 그런 아내가 조금은 답답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아내를 위해 내가 대신 채워주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결국 동전이란 작은 것이 모여서 큰 돈이 되고, 지금은 500원 한 개가 하찮아도 저 동전 꾸러미가 아내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고 있으니 예전 같은 향수는 크게 없더라도 그 동안 아내가 모았던 동전들에 대한 향수는 오래오래 가지 않을까 싶다.

부부란 어찌 보면 동전 모으기 같은 것이 아닐까. 하루, 이틀, 몇 년, 몇 십년의 세월이 흘러가며 커다란 꿈을 이루게 해주는 서로 가치가 있는 그런 아름다운 존재들…. 오래도록 아내의 동전 모으기가 계속되길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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