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배 조선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



철부지 어린 시절에는 설이나 추석 등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었다. 못 먹고 못 입고 살던 시절이었기에 명절이 되면 맛있는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추석빔이나 설빔도 얻어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추석이나 설날 등 명절이 돌아오면 예전처럼 마음이 설레고 즐거워야 할 텐데 부담스런 마음이 앞서 안타깝다. 나 역시 가난한 종가집 장손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죄(?)로 결혼과 더불어 그 동안 설과 추석 차례, 제사, 시제 등의 행사를 도맡아 진행하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왔기 때문이다. 특히 내자(內者)는 명절 며칠 전부터 행사 준비 스트레스로 인해 나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명절 등 집안 행사 때가 되면 나도 모르게 내자에게 늘 죄인이 된다.

그런데 명절 때마다 TV나 라디오에서'명절 증후군'이란 이름으로 종가 집 며느리 이야기는 물론 장남에게시집 온 큰며느리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집집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명절 증후군'현상이 심각하긴 심각한 모양이다. 사실 장자 사상이 굳어진 것은 조선 시대에'주자 가례'가 들어오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왕위 계승도 장남 승계를 우선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유산 분배에서도 장남이나 장손이 차례, 제사 등 집안 행사를 주관하는 까닭에 다른 자식들보다 더 많이 받았다.

그러나 오늘 날에 와 유산 상속법이 바뀌면서 직계 자손의 경우 장, 차남은 물론 남녀 구분 없이 유산을 균등하게 받는 세상이 되었다. 때문에 장손이나 장남이라고 해서 집안 행사를 도맡아 치를 이유도, 근거도 없어졌다. 이런 까닭에 조상 제사를 모시고 명절 차례를 지내는 것이 이제는 장남이나 장손만의 몫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다만 지금처럼 명절이나 제사 등 집안 행사를 핑계 삼아 멀리 떨어져 있는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이는 것은 조상님들께 감사드리고 아울러 서로 회포를 풀며 피를 나눈 형제자매로서 우애를 돈돈히 하고자 해서 일 것이다. 그래서 명절 때 마다 천리 길도 마다 않고 귀성, 귀경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세시 풍속도가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남이나 장손이 집안 행사를 주관해야 한다는 의식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이런 까닭에 철없는 동생들은 맏이로 태어나 부모님 사랑을 자신들 보다 더 많이 받았으니 당연하다고 억지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선택해 태어날 수 없듯 장남 역시 스스로 부모를 선택해 장남이 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따라서 벗을 수만 있다면 장남, 장손으로서 무겁게 짊어진 멍에를 벗어버리고 싶을 때가 다반사다. 더 솔직히'빛 좋은 개살구'역할에서 이제 그만 해방되고 싶은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평소 집안 행사를 등한시 하고 무관심한 형제들일수록 어쩌다 한 번 행사해 참석하게 되면 그 동안 집안일을 혼자 도맡아 해 온 것처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앞뒤 생각 없이 이런 저런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 놓는다. 속된 말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갈 텐데…. 물론 본인은 자신이 똑똑해 그런 줄 알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형제들 앞에서 스스로 무식함을 드러내 결국 미움을 사고 마는 것이다.

심지어 학창 시절 자신이 방탕하고 공부하기 싫어 진학을 포기해 놓고도 그것마저도 장남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지난날을 미화시키거나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 때는 기가 콱 막혀 한 대 갈겨 주고도 싶지만 대꾸할 가치가 전혀 없어 그냥 무시해 버린다. 그런 동생을 나무라고 잘못을 지적해 본댔자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 왔고 또 애시 당초 그렇게 생겨 대화가 통할 리 만무하고 좋은 날 결국 형제간에 싸움판이 될 게 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생들이 이유도 없이 집안 행사에 불참할 때는 전화를 해서 야단을 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혹시라도 행사 비용을 보내지 않아 그런가 하고 오해할까봐 마음속으로 그냥 새기며 지나간다. 집안 행사에 참석한 동생들 또한 금액에 관계없이 봉투 하나 내미는 것으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집안 행사 때마다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하다. 동생들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위로를 받는 것이 돈 봉투보다 더 고맙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년 명절과 제사, 시제 등 행사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런 까닭에 어떤 집안들은 음식도 나누어 해 오고 공동 비용을 갹출해 행사를 치른다지만 전국적으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경우 음식을 해오는 것도 어렵다. 그리고 사는 것이 어려운 형제자매가 있을 경우는 공동 경비 갹출도 쉽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집안행사를 준비하고 치를 때 마다 이런 행사가 과연 필요한지 회의가 들기도 한다. 따라서 21세기 국제화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은 이와 같이 허례허식으로 가득 찬 명절이나 제례 문화를 개선하든지 폐지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때문에 나는 내자와 자식들에게 지금부터 유언처럼 말하고 있다. 땅도 좁은 나라에서 느는 것이 묘지라고 하는데 애국하는 차원에서라도 "내가 죽거들랑 화장시켜 강이나 바다에 뿌려버리든지, 그것이 서운하면 납골당에 두든지 하라고…", 그리고 "절대 제사는 지내지 말라"고…. 결국 죽어서 제사 밥을 구걸하는 노숙자 신세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람은 죽음으로써 일반 동물처럼 인간으로서의 길흉화복(吉凶禍福)도 끝나는 것이다. 때문에 사후에 후손들로부터 제사니 성묘에 미련을 갖는다는 것은 겁 많고 나약한 인간의 마지막 몸부림쯤으로 치부해도 좋지않을까. 몰론 혹자는'조상 없이 어찌 네가 있을 수 있었겠느냐'고 힐난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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