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장필 (주)윌비솔루션 대표이사



어느 토요일 새벽 2시 40분, 무교동의 새벽은 아직도 불야성이다. 특히 포장마차가 모여 있는 이곳 골목은, 이미 몇 차례 차수를 바꿔 마시다 헤어지기가 아쉬워 마지막 한잔을 기울이며, 전작에서의 이야기 거리들을 목청 돋아 다시 복기하는 애주가들의 시끄러움으로 가득한 곳이다.

"어이 구 팀장, 벌써 왔네."포장마차 한쪽 구석 테이블에 구팀장과 정과장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삶은 오징어 한 조각을 초고추장에 찍어 입에 넣고 있었던 구팀장과 그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던 정과장이 나를 반갑게 맞아 준다.
"염 팀장님 어서 오세요, 앉으시죠.""아주머니, 여기 소주잔하고 젓가락 좀 주세요.""둘은 일찍 왔는가 보네, 다른 친구들은 아직 안 왔는가?" 소주병에 남은 소주가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다, 꼼장어구이 안주도 이미 절반은 없어졌다. 아마도 삶은 오징어는 이제 금방 나온 것 같아 보인다.
"3시 반이면 다 올 겁니다." "오늘 몇 명이나 가는 거지" "모두 13명이 갑니다. 여의도 박 지점장하고, 인사부 강 차장 그리고, 아, 저기 박 지점장님 오시네요." "어이, 박 지점장 오래간만이야, 이리 앉지" "얼굴 좋네, 요즘 지점장 생활 할 만한가 봐, 체질 아냐" "이러지마, 속은 곪았어."
오늘은 은행 낚시회에서 우럭을 낚기 위해 서해로 출조하는 날이다. 낚시회는 1년 후배로 총무인 구팀장과 몇몇 골수들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출조 날에는 항상 이곳 무교동 포장마차에서 만나 출발하고는 한다.

우리 낚시회는 우럭을 낚을 때는 주로 군산항에서 출발하여 새만금 방조제 주변으로 출조 하여 왔다. 새만금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주변의 뻘들이 씻겨 나가 돌밭으로 변하였고, 이제 방조제 주변은 물 반 우럭 반인 우럭 낚시터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 출조는 인천항을 선택 하였다. 인천항에서는 남쪽으로 2시간 반을 내려가, 안흥 앞바다, 무창포 앞바다를 돌며 우럭과 자연산 광어를 낚는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요즈음 인천항 주변에서 잘 낚이는 백조기 낚시를 더불어 할 계획이다.
어느덧 술자리에는 8명이 모였다. 몇몇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여자도 보인다. 시내의 어느 지점에서 근무하는 젊은 친구들이 동료 여직원과 함께 출조한 모양이다. 그들은 강 차장으로부터 지난번 군산에서 아이스박스 가득 우럭을 잡아 올렸던 무용담을 들으며 온 시선을 그에게 집중하고 있다.

"야 그 놈이 얼마나 큰지 낚시대가 꿈쩍도 안 해, 꼭 돌덩이 같아" "양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참 손맛 죽여주더라." 강차장의 입에서 침이 튄다. 그리고 그 입이 옆으로 쭉 찢어지며,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진다. 그의 오른손은 이미 허공을 향해 불쑥 올라가 있다. 그 때 그가 대물을 낚는 장면을 나도 옆에서 지켜보았었다.
"금방 잡은 팔뚝만한 우럭을 회를 떠서 입 속에 넣어 봐, 기가 막히지" "씹을 필요도 없어, 입 속에서 스르르 녹아 저절로 목구멍으로 넘어 가" "거기에다 소주 한잔을 털어 넣으면, 지상낙원 아니 해상낙원이 없지, 없어"," 잡은 싱싱한 놈으로 끓인 우럭 매운탕
먹어 봤어, 진짜 죽여줘"
테이블 저만치에서는 구 총무가 강 차장이 양팔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풀어대는 입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린다. 그리고는 시선을 신참 3명에게로 돌린다. 나 또한 그들을 쳐다보았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목젖을 움찔하는 그들은 처음으로 떠나는 바다낚시에 대한 기대감과 설레임을 잔뜩 품고 있는 듯하다.

"자 이제 모두 앞에 있는 잔을 들고 건배합시다, 오늘 출조에서 모두들 아이스박스 가득 잡으시기 바랍니다. 건배는 파이팅 입니다."
"파이팅!""파이팅!""자 이제 출발합시다."
구 총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출발을 독려한다. 그러고 보니 벌써 새벽 3시 반을 넘어서고 있다.
"아니 다섯 명이 아직 안 왔는데"," 아, 나머지는 인천항으로 직접 온다고 했어요, 거기서 조인합니다."
한 시간여 동안 마신 소주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소주 1병이 정량인 내가 1병을 넘게 마신 것 같다. 일어서는 발걸음이 휘청거린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주변에 주차해둔 승용차 2대에 나누어 타고 인천으로 출발하였다. 차창을 통하여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다. 상쾌함마저 느껴진다. 앞자리에서 누군가가 이야기 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다.

인천항은 낚시를 떠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여기저기서 낚시꾼들을 모집하려는 낚싯배 선주들이 소리치며, 손짓으로 호객을 하고 있다. 곳곳에서 가격을 흥정하는 사람들, 쭈그려 앉아 컵라면을 먹는 사람들, 어깨에 낚시 가방을 메고 양손에는 아이스박스와 각종 물건들을 들고는 배를 타러 걸어가는 사람들이 물결을 이룬다.
우리 일행은 사람들의 물결을 거슬러 헤쳐 가며 예약한 낚시가게를 찾아 들어 갔다. 그곳에서 나머지 일행을 만나기로 하였다. 이곳은 인천에서 출조 할 때마다 단골로 이용하는 낚시가게이다. 여기서는 항상 우리 출조 인원에 맞는 배를 마련하여 우리 낚시회원만 오붓하게 낚시를 즐기게 해 준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채비들을 구매하고 있는데, 모 영업점 이지점장이 그의 아들과 함께 낚시가게로 들어선다. 그는 나와 입행 동기다.

"야, 이 지점장, 오래간만이네. 아드님이신가?"
"인호야 인사 드려, 아빠 친구야."
"안녕, 씩씩하게 생겼네. 반갑다. 몇 학년이야?"
"중1 이예요."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얼굴에 졸음이 가득하다. 귀볼 아래에는 배 멀미에 대비하여 멀미약을 붙이고 있었다.
"배고프지, 뭐 좀 먹을래, 컵라면 줄까?"
"안 돼, 지금 라면 먹으면, 멀미 할 텐데."
"멀미약은 언제 붙였는데?"
"어제 밤에."
"잘 했네. 그럼 멀미는 안 할 테니 걱정 안 해도 돼, 먹여둬."
"지금 먹지 말고, 승선을 하면 아줌마가 라면을 끓여 줄 거야 그때 먹어라."옆에 있던 구 총무가 거든다. 그리고는 갑자기 낚시가게 밖으로 뛰어 나간다.
"임 차장, 여기야, 여기"나머지 일행이 도착한 것이다.
"서둘러야겠어, 빨리 작성해 주세요."구 총무가 승선명단 작성을 재촉한다.
"동진 2호."우리가 승선한 낚싯배다.
"정원 12명."
이 배의 갑판에서 선실로 들어서는 입구에 그렇게 쓰여 있다. 그러나 이 배에는 지금 15명이 승선하고 있다. 우리 회원 13명과 선장님, 그리고 식사와 회를 떠 주실 아주머니까지, 3명이 정원초과인 것이다.

어스름한 아침 바다를 가르며 달려가는 배의 난간에 기대어 바다 바람을 맞는다. 상쾌하다. 아니 끈적끈적 하다. 늘 그렇다. 항구를 떠나는 배에서는 항상 상쾌함과 바다 특유의 비릿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아까 마신 소주의 술기운이 싹 가시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이 느낌은 항상 좋다. 그것은 오늘 낚시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서 일 것이다.
"여기서 뭐하세요, 시간이 돈인데."
"그럽시다. 다른 멤버들은?"
"이미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리 가시죠."
어느새 강 차장이 내 옆에 다가와 바람을 잡는다. 인천에서 출항하면 낚시할 장소까지 약 2시간 반을 달려가야 한다. 그동안 우리 골수들은 늘 선실에서 고스톱을 하고는 하였다. 오늘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오늘 되게 안 되네."
"염 팀장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벌써 몇 만원을 잃었다. 오늘 왜 이렇게 설사를 자주 하는지 모르겠다.

왠지 감이 좋지 않다. 돈을 잃는 것 보다 오늘 낚시가 허탕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앞선다.
"오는 일기예보는 어때?"내가 물었다.
"파도가 0.5에서 1미터. 맑음, 기가 막힌 날씨야."
"해가 따가울 테니 선크림을 발라 두는 것이 좋을 거야."
구 총무 대신 이지점장이 대답한다. 아마도 아들을 데려 오면서 이것저것을 알아본 모양이다.
"참 이상하지, 골프 할 때는 항상 선크림을 바르는데, 낚시할 때는 안 바르니." "그러게, 듣고 보니 그러네.", " 밀짚모자에 수건 두르는데 웬 선크림?"
갑자기 배가 속도를 늦춘다. 목적지에 가까이 도착한 것이다.
"이번이 막 판이야."
구 팀장이 고스톱 판을 정리할 모양이다. 돈을 잃었지만, 낚시할 시간이 되었으니 그만둘 수밖에 없다. 돌아가는 길에는 인천으로 가면서 낚시를 계속하므로 고스톱을 할 수 없다.
더구나 오늘은 인천 앞바다에서 백조기 낚시까지 예정되어 있으니, 지금 잃은 돈은 복구할 기회가 없다. 낚시나 열심히해서 아이스박스에 가득 채우는 수밖에….

드디어 낚시가 시작 되었다. 여기저기서 환호 소리가 요란하다. 굵은 놈을 잡은 모양이다. 오늘 나는 낚시가 너무 잘된다. 낚시를 시작 한 지 2시간여가 지났는데, 나는 벌써 굵은 놈 여러 마리와 중치들을 포함하여 아이스박스가 목까지 차오고 있다. 고스톱 치면서 걱정을 하였는데, 기우였던 것이다. 날씨도 좋고, 조황도 너무 좋다. 낚시를 다니면서 이런 날은 드물다. 오늘 나는 복 터진 날인 것이다.
아이스박스가 차오면서, 우리들의 배는 점점 허기져 간다. 아까 아주머니께서 끓여 주신 라면을 먹은 지 4시간이 지났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하다.

"아주머니, 회 좀 떠주세요."
오늘 입질을 적게 받아 한참 열이 받친 구 총무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결국 낚시보다 먹기를 선택한 것이다.
"염 팀장님, 몇 마리 내 놓으시죠."
"응, 오늘 낚시 너무 잘되네, 거기 아이스박스에서 꺼내 가."
"야. 팀장님 오늘 진짜 많이 잡았네, 장원이야."
"큰 놈으로 2마리하고 중치 2마리 가져가, 기분이다. 회 떠서 한잔 하지."
"어, 물었다. 크다!"
그 사이에 내 낚싯대가 다시 휘청거린다. 감이 좋다. 역시 대물이 걸렸다. 짜릿한 손맞이 전신으로 퍼진다. 옆에 있는 구총무가 소리친다.
"야, 대물이다."
그렇다. 오늘 내게 유난히 대물이 많이 걸려든다. 진짜 오늘 나는 비록 고스톱에서 돈은 잃었지만 행운이 깃든 날인가 보다.
모두 갑판에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가운데에는 막 잡은 우럭으로 뜬 회와 매운탕, 그리고 도시락이 펼쳐졌다. 짜릿한 손맛을 즐긴 후, 꿀맛 같은 점심시간이다. 소주잔이 마구 오고 간다.
나도 꽤 많은 잔을 받았다. 나에게 소주잔이 집중되는 것을 보니 내가 오늘 많이 잡은 모양이다. 즐겁다.
몇몇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점심을 먹으며, 입 속에 들어간 우럭 회가 스르르 녹아 목으로 저절로 넘어가는 기분 좋은 느낌도 몇 차례면 족하다. 집에서 기다리는 식구 들, 앞집, 옆집,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잡아 올 테니 저녁에 냄비 들고 오라고 큰 소리 쳐 놨는데, 더 잡아야 되겠다는 생각들을 한 것이다. 많이 잡은 사람들을 보니 조바심이 나서, 마냥 앉아서 오찬을 즐기기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스박스를 가득 채운 나로서는 서두를 일이 없었다. 몇 명 남은 이들과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아주 만족스러운 긴 오찬을 더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이 마음은 나뿐이었나 보다. 나머지도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이제는 다시 낚시를 해야 할 시간이다.
다시 낚시를 들었다. 낚시 대를 넣자마자 신호가 온다. 우럭이다. 내 아이스박스는 이제 더 들어갈 틈이 없다. 옆에 있는 이 지점장 아이스박스를 열어 넣어 주었다. 이 지점장이 웃는다. 갑자기 술기운이 올라온다. 마음이 넉넉하니 이제는 쉬고 싶다. 선실에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야, 염 팀장 일어나."
선실에서 한참을 자고 있는데 이 지점장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이불을 젖히며 반쯤 일어나 앉은 나를 향해 옆에 서있는 구 총무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얼굴에 근심이 잔뜩 들어 있다. 그들의 상체에는 붉은색 구명조끼가 둘러져 있다. 시선을 돌려 선실을 보니 모두 구명조끼를 입은 회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순간 배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어떤 이는 어린이용 조끼를 억지로 껴입은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그러
나 웃음이 나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머리를 스쳐간다.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강하게 불고, 안개가 잔뜩 껴서 앞을 볼 수가 없어." "파도가 집채만 하게 치고 있어, 배가 견디기 힘들어 보여."
"갑판에 나가면 배가 흔들려 곧 바다로 빠질 것 같아 모두 선실로 철수 하였어."

내가 잠든 사이 일기가 갑자기 돌변하였던 것이다. 우선 나도 구명조끼를 찾아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선실의 구명조끼 비치 장소를 뒤져 보았으나 구명조끼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 이 배는 정원이 12명이고, 구명조끼는 12개만 준비되었던 것이다. 우리회원 13명, 선장, 아주머니 모두 15명에게 돌아갈 구명조끼는 없었다.
12개의 구명조끼는 나를 제외한 우리 회원 12명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허탈함을 느꼈다. 이 순간 입가에는 왜 실소가 번지는 것일까, 순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집에서 출발할 때, 바다낚시용 구명조끼를 갖고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팽개쳐 놓고 온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사실 이 더운 여름에 구명조끼를 입고 낚시를 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선상 낚시를 하면서 구명조끼를 입는 이는 별로 없다. 물론 일부는 철저하게 안전 장구를 갖추는 이들도 있다. 구명조끼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이렇게 후회스러울 수 없다. 또한 우리회원 13명 중 나만 구명조끼를 차지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우리 회원들이 야속하다는 얄팍한 생각도 머리를 스친다.
그래도 선실에 앉아만 있을 수는 없다. 이 지점장, 구 총무와 함께 선장실로 들어섰다. 선장의 얼굴에는 구슬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60이 넘어 보이는 선장님은 앞을 주시하면서 말없이 열심히 배를 조종하고 있다. 오히려 깊은 절망 속에서 바라보는 선장의 얼굴에서는 왠지 약간이나마 희망의 빛이 보인다.

밖을 쳐다보니 1M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다. 저 멀리 흐릿하게 섬의 모습이 보인다. 배는 굉음을 내면서 앞으로 달리고 있으나 흐릿한 섬은 마냥 제자리에 있다.
배가 아무리 힘을 내어 달려도, 바람과 물살을 헤쳐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있는 것이다.
순간 집채만한 파도가 뱃머리에 부닥쳐 왔다. 이번 파도는 배를 세로로 넘어 선미에 떨어졌다. 말로만 듣던 일엽편주에 내가 몸을 싣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두려움이 가슴을 덮쳐 온다. 순간 집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 얼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이것은 내가 태어나 느낀 공포 중 최고의 공포이다. 지금까지 내가 조금 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만감이 교차하면서도 흐릿한 섬에라도 상륙을 하였으면 하는 생각만 들었다.

"아무래도 나침반이 고장인가 봐."
나름대로의 정적을 깨며 선장이 말했다. '내가 선장을 그만 둔 지 6개월이 됐지, 선주가 오늘 아르바이트를 해 달라해서 이 배를 탔는데, 아무래도 나침반이 고장인 것 같아, 남과 북이 바뀐 것 같아.'이 말을 듣는 순간 나와 이 지점장, 구 총무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는 선장에 대한 불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우리들의 머리 속에는'선장을 그만두고 6개월 만에 아르바이트로 나왔다', '나침반이 고장 나고, 남북을 거꾸로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는 선장의 말이 빙빙 돌고 있다. 무엇을 믿어야 하나, 선장의 말을 믿어야 하나, 나침반을 믿어야 하나, 혹시 이 안개 속에서 우리는 중국으로 가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북한까지 올라가는 것은 아닌가, 아니 어디든 가기도 전에 파도에 배가 전복되어 서해 바다에 수장되는 것은 아닌가.

"선장님, 나침반이 고장 난 것은 맞습니까?"선장은 묵묵부답이다. "선장님, 인천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선 저 섬에 상륙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역시 선장은 묵묵부답이다.
"이 파도에 부두도 아닌 섬에 상륙은 불가능할걸, 더 위험한 것 아냐?"
"그렇더라도 섬 옆에 있으면, 바다 한 가운데 보다는 안심이 될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집채만 한 파도가 뱃머리를 때렸다. 그 때마다 선장은 키를 이리 저리 돌리며 온 정신을 쏟아 배를 조종하였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누구 낚싯대 좀 갖다 줄래요."드디어 선장이 입을 열었다. " 낚시가 달려 있고, 추도 달려있는 놈으로 주세요."구 총무가 선실로 달려가 낚싯대를 가져 와 선장에게 건넸다. 선장은 한 손으로는 선장실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낚싯대를
바다로 던졌다. 그러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몇 시죠?"
선장님은 지금 날짜와 시간을 손가락으로 꼽아 보며, 물살의 흐름을 헤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나는 잘은 모르겠지만, 60이 넘은 선장님이라면 물살의 흐름을 측정하고 날짜와 시간을 이용한다면 이 안개 속에서 방향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 이 상황에서는 기계를 믿을 것이 아니라 선장을 믿고, 그의 판단에 따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선장님, 방향이 잡히십니까?"선장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선 내가 그에게로 다가서며 물었다. "나침반이 거꾸로 가리키는 것 같아"선장은 예의 그 말을 반복하고 있다.
"선장님 판단대로 가시지요, 나침반은 무시하고."선장실 안에 있는 모두들이 눈으로 동의해 오고 있었다. 순간 또 한번의 파도가 배를 덮쳐 왔다. 배가 요동을 친다. 그렇지만, 마음을 정하고 나니 불안감 속에서도 무엇인가 작은 희망이 느껴진다.
선장실에는 다시 침묵이 흐른다. 선장실 밖에서는 파도소리만 거세게 들려온다. 배의 엔진 소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굉음을 내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순간 흐릿하게 보였던 섬들이 점점 우리 뒤로 물러서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바람과 파도에 밀려 제자리에 서 있다시피 하던 배가 앞으로 조금씩 나가고 있는 것이다. 밖에 손을 내밀어 보니, 빗발이 많이 약해진 듯하다.
문득, 뱃머리를 때리고 배를 삼킬 듯이 덮쳐오던 집채만한 파도가 지나 간지도 꽤 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어느덧 안개도 점차 거쳐 가는 느낌이다. 파도소리도 많이 약해졌다. 배의 요동도 많이 약해 졌다.
순간적으로'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옆을 쳐다 보니 이지점장의 얼굴도 많이 펴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 후, 갑자기 앞이 훤해 졌다. 안개가 순식간에 완전히 거쳐진 것이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앞에는 저 멀리 인천항이 눈에 보인다.
바람도 멈추었다. 다시 하늘에는 밝은 태양이 비친다. 마치 잠시 꿈을 꾸었다가 다시 깨어난 기분이다. 선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도 모두 긴장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제 생각하니 그 공포의 순간에는 담배 피는 것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인천항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선장님, 고생하셨는데, 그래도 백조기는 잡으러 가야지요?"선장이 구 총무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러지요."백조기 낚시도 잘 된다. 언제 죽음의 공포가 스쳐갔는지 모두 백조기가 낚는 맛에 빠져 있다. "구 총무, 이제 가자."내가 재촉했다. "그래야겠지요, 선장님, 귀항하시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동안의 공포를 되새겨 본다.
'앞으로 바다낚시는 가지 말자.' '아니야 바다낚시 없이 무슨 낙으로 살지…'. ' 그래 구명조끼는 반드시 챙기자.'
그리고'집사람에게 비밀이 하나 늘었구나.' '여보, 오늘 아무 일도 없었어.'

※본 수필은 본지가 발간한'창공에 빛나는 별 하나'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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