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의선 경기대학교 산업보안학과 교수



내가 대학 1년생이던 1973년 겨울은 제 1차 오일쇼크의 엄습으로 유가가 5배나 치솟고, 국내 정치는 유신 대 반 유신 투쟁으로 얼룩져 지금도 가장 춥고 어두웠던 시절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때 처음으로 영어 공부도 할 겸해서 앨빈 토플러의 제 3의 물결이라는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 책에서 토플러는 에너지와자원을 사용하여 발전해 온 산업 발전의 역사는 끝나고 이제부터는 정보 혁명을 통해 에너지와 자원을 절감시킬 수 있는 산업구조의 형성이 새로운 국부를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의 예언대로 사람과 사람 간의 의사소통 수단이었던 통신의 개념이 사람과 컴퓨터 간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확장되었고, 80년대에는 반도체(Semi-conductor), OA(Office Automation), FA(Factory Automation)라는 새로운 기술 용어가 유행했다. 나의 30대는「정보통신」의 등장과 더불어 그렇게 지나갔다.

나의 오랜 기억 속에 우리나라는 극동 아시아라는 아주 변방에 쳐져 있고, 한국전쟁으로 지지리도 가난한 나라,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희망을 갖고 열심히 뛰어 다니는 그런 모습이었다. 1986년 9월, 10회 아시아 경기대회가 열리고, 1988년 9월, 제24회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자신감이 주변의 모든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 동안 남과 북의 극한적인 군사적 대립 속에서 제한되었던 전파 사용이 논의 되고, CDMA 방식에 의한 디지털 이동통신기술 개발이 내가 있던 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시작되었다. 1996년 1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디지털 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90년대에는 삐삐, PCS, 휴대폰이라는 통신 상품이 유행되었다. 나의 40대는「이동통신」의 등장과 더불어 그렇게 또 지나갔다.

그런데'하면 된다'라는 말은 오랜 동안 나의 기억 속에서 독재, 억압, 권위 등등의 상징이었다. 2002년 6월에 열린 월드컵 4강의 신화는 훌륭한 히딩크라는 리더 밑에서 한국 축구가 일궈낸 단순한 쾌거가 아니었다. 붉은 악마(Red Devil)를 중심으로 국민 모두가 하나 되어'할 수 있다'는 목표를 향해 매진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2000년대에는 물류나 프라이버시를 중심으로 RFID, CCTV, 바이오인증, 개인정보 보호라는 개체적 용어가 시대 흐름의 화두가 되었다. 지금 나의 50대는「정보보안」의 등장과 더불어 흘러가고 있다.

오늘 날 경기 침체와 유가 급등에 의한 국부 유출은 제 3차 오일쇼크로 불릴 만큼 우리를 옥죄고 좌절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에너지 절약적이며, 지식 집약적인 새로운 산업구조의 창출과 신 성장 동력 산업의 개척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나는 이제 내 나이 50대를 IT 융,복합과 가장 중요한 「정보 보안」, 그 속에서 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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