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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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지난 주의 어느날

▲ 전용기 경상대학교 정보과학과 교수



난 요즈음 어디론가 도망을 가 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예전엔 아내가 주말에 바람을 쐬고 싶다고 보챌 때마다,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그 반나절의 시간이 아까워서 쩔쩔 매며 마지못해 따라 나선 적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젠, 오히려 내가 은근히 아내에게 제안을 해 보기도 한다. 아직은 아이디어나 테크닉이 부족해서 아쉬운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생각이 즐겁다. 4, 5년 전만 해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실로 출근을 했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평일에도 출근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으니 분명히 내 안에 놀라운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무조건 덮어두고 잠시 잊어 버려도 그리 크게 낭패를 보는 일도 없으니 더라는 교훈도 쌓여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저 지난 주의 어느 날이었다. 대학 때부터 친한 가까운 선배로부터 연구실로 전화가 왔다. 어떻게 지내냐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이런저런 주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번에도 난 예전과 다른 나를 본다. 예전에는 지인의 연락을 받아서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과 함께, 그 당시에 하고 있던 일에 사로 잡혀서 그 고마운 연락이 귀찮게 느끼기도 했던 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정말로 반갑고 고마워서 전화를 놓기가 싫었다. 특히 이 선배는 나의 무심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자주 연락도 하고 심지어 직접 찾아오기까지도 한다. 한반도의 남쪽 끝인 이곳까지 찾아오는 일은 보통의 성의로 되는 일은 아니다. 활동 범위도 그렇게나 넓고 최고 권위의 한 학회로부터 학술상까지 받은 유명한 선배가 나한테는 어찌 그렇게 시간을 낼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마 선배는 심심할 때마다 하필이면 내가 생각나나 보다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긴, 올 때마다 자기 얘기만 실컷 하고 가지만 그렇다고 중요한 얘기가 많은 것도 아니다.

이번 선배의 부탁은 자기네 학과에 와 강연을 한 번 해 보란다. 그런데 진짜 목적은 강사료 가지고 소주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날을 정했다. '한 잔 하려면 금요일 오후가 좋지.'나는 스스로에게 또 놀란다.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내 모습이다. 그런데 그 후부터 거의 매일 적어도 한 번은 그 선배를 만나는 주말을 생각한 것 같다.

드디어 강연을 하던 그 날, 부실했던 강연 준비에 비하면 전달한 내용도 꽤 있었고, 청중의 반응도 대단히 좋았다. 그 만족스러운 기분은 저녁 시간까지로 이어졌고, 소주 맛도 좋았다. 예나 다름없이 선배도 여전히 횡설수설 자기 얘기에 만취해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우리 모습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이번에는 나도 덩달아 같이 문맥을 무시하고 마음껏 우왕좌왕 오락가락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2차를 가야지?'선배는 자기가 그 동안 가끔 가 본 좋은 곳이 있단다. 가보고 싫으면 옮기면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반가워서크게 웃었다. '선배가 좋아 하는 곳?'내가 너무 잘 안다. 소주집이다. 특히 방안 구석마다에 곰팡이가 피어 있음직하며, 퀴퀴한 냄새가 은근히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장판 집, 그런 집이라야 딱 어울린다.
그런데 놀랐다. 이번엔 아니란다. 그 선배와의 인연이 30년이 넘는데…. 그 동안 내가 그를 꽤 아는데… 아니라니…
그 날 우리가 간 곳은 제법 큰, 어쩌면 소란스러울 것도 같은 클럽 형 술집이었다. 스탠드바들을 중심으로 라이브 무대가 있는, 상당히 모던하고 편안한 그런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사실 이런 곳에 와 본지가 10년, 20년은 된 것 같으니까,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 표현인지 조차도 모르겠다. 그런데'스탠드바'라고 하면 안 된다나? 그건 옛 아저씨 스타일의 바이고, 지금의 분위기는 그냥"빠"라고 해야 한단다. 근본적으로 다르단다. 초저녁이라 손님도 별로 없는 분위기에서 60~70년대의 조용한 복고풍 음악들이 나를 쉴 새 없이 자극했다. 기분이 좋았다. 시계도 보기 싫었다. 어차피 내일 돌아가기로 했으니까 볼 필요도 없었다. 이상하게 그리 취하지도 않았다. 항상 그렇듯이 선배도 여전히 말짱했다.

라이브 가수도 등장했다. 이 가수는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 딱 30분만 부르고 딴 업소로 간단다. 그렇게 초저녁까지 내내 무척 바쁜 유명인이란다. 조금 전에 몰려 들어온 손님들은 이 여자를 보러 온 것이란다. 신청곡을 받는다니, 이런 것은 예전이나 같네. 하지만 대단한 실력이었다. 자신이 준비한 곡은 하나만 부르고, 나머지 시간들을 모두 신청곡으로 채웠으니… 신청곡에는 흔하지 않을 법한 곡들도 꽤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선택되고 싶은 욕심에 가수가 알만한 곡을 고민해서 신청해 보았다. "When I Dream."독백하듯, 호소하듯, 절제된 감성으로, 하지만 짙은 호소력으로 속삭이는 가수. 하늘거리는 실크의 촉감처럼, 하지만 매끄럽지만은 않게, 포근하고 따뜻하게 내 눈을 감게 만들었다. 잊어버리고만 있었던 내안의 이 느낌, 정말로 얼마 만인가. 그래. 돌아가면 아내에게 이것도 제안해 보아야겠다. 재즈 바를 알아볼까? 와인 바를 알아볼까. 마음이 급해 졌다. 인터넷도 뒤져 보아야할 것 같았다.

정년퇴임 후에 뭘 할 거냐고 물으면, 그 동안 난 당구장할 거라고 말해 왔다. 이런 기억도 사실 오래된 것이다. 대학 때부터 동경했던, 고급스럽고 품위가 넘치는 당구장. 당구공의 진행 각도 및 회전을 정확하게 생각해야 하니, 당연히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정교한 힘과 정확한 스탠스, 제법 오랜 시간을 버티어야 하는 지구력, 모두 말년의 균형 잡힌 건강을 위해서 좋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계획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음악도 좋겠다. 듣는 음악은 정신 건강에 좋고, 부르는 음악은 몸 건강에도 좋잖아. 왜 지금까지 노래방에서 하는 이벤트성 노래만을 생각했을까? 정년퇴임 후에 할 일에 대해서 고민거리가 다시 생겼다.

다음날 연구실로 선배가 또 전화를 했다. 초청 강연료를 보내기 위해서 필요한 서류가 더 있다나? 그러면서 말했다.' 어제 술집보다 더 좋은 곳이 생각났으니, 나중에 초청강연 한번 더 할 수 있냐?'고 말이다. 나도 웃으면서 물었다. '형이 나한테 작전을 바꾸었나보네. 근데 언제 그렇게 취향이 바뀌었지?'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우리는 내재된 취향을 서로 숨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의 취향은 분명히 둘 모두에게 편안한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선배에게 솔직해져야겠다. 나 자신은 물론 내 나이에 솔직해지기 위해서라도….

※본 수필은 본지가 발간한'창공에 빛나는 별 하나'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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