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특검에 의해 밝혀진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 보유액은 4조 5천억원. 이 가운데 1조 쯤 떼어내 10억 씩 1천 개 소프트웨어 기업에 투자하면 어떨까. 순전히 연구개발비로, 기발하고 제법 실현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젊은 벤처들을 공모해서, 거저 주는 게 아니라 성공하면 투자비를 회수하는 방식으로….

가칭 '삼성 벤처R&D기금' 같은 것을 만들고, 삼성의 정교한 투자기법을 활용하면 원금 1조원은 수백 조의 가치를 순환창출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렇게 하면 당장 과제인 일자리 창출은 물론 경제살리기의 동력이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미래의 국가경제사회에 크게 이바지하는 역사적인 대업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도랑치고 가재 잡듯' 흐려진 삼성의 이미지도 어느정도 개운해지지 않을까.

22일, 삼성은 국민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일대 쇄신안을 발표했다. 이건희 회장의 경영일선퇴진과 전략기획실 폐지를 선언했다. 그간의 모든 허물을 이 회장 자신과 전략기획실에 쓸어담고 동귀어진하겠다는 것이다.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의 핵심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도 잠시 그 직을 떠나게 하고 글로벌 현장으로 내몰았다. 당장 경영권을 승계하는 모양새도 볼품없을뿐더러 현장 체험을 통한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게 함으로써 삼성왕국의 차기 경영인으로서의 진정한 능력을 다져라는 주문인 것 같다. 여기에는 치열한 글로벌 경쟁현장에서 경력을 쌓아 손색없는 회장감의 면모를 대내외적으로 보여주겠다는 포석도 깔려있을 법 하다.

지난 1966년 삼성은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온 나라를 충격에 빠트렸다. 그 후 만 40년만인 2007년 삼성은 경영권 불법승계, 차명계좌를 통한 비자금 조성, 정·관계 로비의혹 사건 등의 죄목으로 또 다시 나라 안팎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삼성특검을 맞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번 삼성특검에 대해 국민들은 한 가지 공통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돈과 권력에 굴하지 않는 법의 집행을 보고자 함'이었고, 그렇지만 '글로벌 삼성의 위상이 결코 흔들려서도 안 된다'라는 지극히 이율배반적인 시각이었다. 물론 이같은 이율배반적 시각의 기저에는 더 이상 불법경영수완으로 기업이 잘되는 후진 나라의 국민이 되고 싶지 않다는 염원과 삼성의 위기가 불러올 경제적 쓰나미라는 현실적인 고심이 뒤범벅이 돼 있었다.

그러나 삼성 특검은 2008년 4월 17일, 삼성그룹에 사실상 면죄부를 안겨주었다. 특검측의 변에 따르자면 삼성의 경제적 위상에 너무 치우친 결과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대한민국 국민들로 하여금 '돈 앞에서 평등하지 못한 법'의 현실 앞에서 다시 한 번 깊은 박탈감과 자괴감에 빠져들게 하는 역사적 과오로 기록될 듯 싶다.

22일 발표한 삼성의 쇄신안은 이래저래 상처가 깊은 국민들의 심정을 어느정도나 달래 줄 수 있을까? 이 회장을 비롯한 일가의 경영일선 퇴진과 불법의 온상이었던 전략기획실의 폐지는 발표 순간, 지켜보는 이들에게 잠시 후련함을 주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전문경영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각 계열사들의 독자적 경영권을 확보해주겠다는 것도 쇄신안에 걸맞은 내용임에 틀림없다. 은행사업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약속도 우리 경제구조의 막혔던 한 부분을 뚫어주는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 사장단 협의회 산하의 업무지원실이 걸리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 필요성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종합적으로 삼성은 장기적으로는 지주회사 체제 등 투명한 글로벌 삼성의 면모를 약속했다. 그러면서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국민들이 키워줄 것을 부탁했다.

삼성의 이번 쇄신안은 삼성측의 말대로 "이것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고 시작이며 앞으로 계속 고쳐 나갈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쇄신안이 아무리 획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이제 국민들은 당장 감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감동의 물결은 삼성이 약속대로, 말바꾸기 없이, 일정대로 착착 실행에 옮겼을 때 비로소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삼성은 쇄신안을 계기로 말라 비틀어진 국민들의 가슴을 감동의 물기로 촉촉이 적셔줄 것인지, 아니면 분노의 피를 역류케 할 것인지를 시시각각 가름할 행보를 시작했다. 지배구조의 변화같은 장기적인 과제에 대한 개선 노력을 가시적인 로드맵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언급하지 않은 로비 자금에 대해서도 빠른 시일내에 공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조치들로 국민들의 상처를 하루빨리 아물게 하는 것이 속죄의 길이라 보여진다.

이 건희 회장이 자신의 실명계좌로 돌아올 차명계좌의 자금을 자신의 일가를 위해 한푼도 쓰지 않겠다고 한 약속은 짐짓 기대하긴 했지만, 참으로 일류 글로벌 기업의 총수다운 마음 씀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따끈따끈한 약속을 식기전에 이행하길 바란다. 이왕이면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경쟁력을 제고하는 부문에 과감히 사용하기를 제안하고 싶다.

이를테면 1조원을 소프트웨어 개발에 쾌척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표 IT기업인 삼성이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세계 일류화를 향한 초석을 다지는 데 거금을 투자하는 것처럼 어울리는 일은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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