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2월 23일은 정보통신부가 태어난 날이다. 사람 나이로 따지면 이제 겨우 15살이다. 공자는 열 다섯 살 때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데, 새정부의 막강한 실력자들이 이제 막 세계 속의 한국을 본격적으로 견인하려 하는 15살의 소년 정통부를 요절시키겠다니…. 역사를 통해 우리는 종종 천재 선열들의 요절을 두고 무척 아쉬워하곤 했는데, 후손들에게 '어리석은 21세기 선조들'이라는 원성을 사지나 않을지 두렵다.






정통부가 태어난 날은 한국이 1등 국가를 함부로 꿈꾸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를 위해 무려 1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체신부는 보다 나은 한국의 미래를 염원하며 정통부라는 '옥동자'를 낳고 스스로 소진했다. 이처럼 정통부는 태어날 때부터 '총아'였다. 산업사회 내내 선진국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던 한국을 일약 그들과 감히 겨뤄볼 수 있게 한 '희망의 산실'이었으며, 유일한 도약대였다.

그리고 우리의 총아는 결코 실망을 주지 않았다. 정보화사회라는 새로운 물결을 슬기롭게 받아들여 삼천리 방방곡곡에 생기를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IT강국'이라는 세계사에 기록될 업적을 남겼다. 수천 년 역사를 통틀어 우리나라가 세계만방으로부터 '강국'이란 칭호를 얻어들은 게 얼마만의 일인가? 어린 나이에 새 역사 창조의 막중한 소명을 안고 힘차게 발진하려는 이 당찬 동력을 왜 끊어버리려 하는지 그 연유를 도대체 납득하기 어렵다.

진정한 실용주의는 '과거지향'이 아니다
정부 조직을 축소개편하겠다는 새 정부의 의지를 존중한다. 관치보다는 민간자율에 맡기는 정책기조 또한 역대 정부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기대를 거는 바다. 더군다나 이념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주의로 국가를 경영하겠다니, 이는 그야말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인수위를 통해 마치 확정된 듯 흘러나오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대하면서 뭔가 조리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기처나 해양수산부 등을 없애버리는 안이 그렇고, 특히 정통부 기능을 해체, 분산시키겠다는 전략은 아무리 이해를 하려해도 동의할 수 없다. 새 정부의 핵심 노선이 실용주의라면 더욱더 정부조직 개편안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모름지기 실용주의란 각종 과거의 고착된 틀을 깨고 실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만 좇는 것을 의미한다. "실생활에 유용한 지식과 실용성이 있는 이론만이 진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 거창한 관념론적·합리론적 설명보다는 인간의 삶에 유용한 변화를 가져올 기술의 성장·개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사전적 해석이기도 하다.

이 사전적인 해석만으로도 과거 산업사회에나 걸맞는 조직으로 회귀하려는 것은 실용주의 노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정통부의 업무중 일부를 산자부나 기타 부처로 이관하는 것이 바로 관념론적이고 합리론적인 사고 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정통부의 존재가치는 이러한 합리론적 판단에 의하면 다소 시비를 걸만한 요소들이 있다. 단순히 산업적인 측면이나 기능적인 면에서 바라보면 그렇다. 그러나 실용주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정통부가 지니고 있는 가치는 더 확대개편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정통부의 가치를 분산시켜 힘을 못쓰게 하기보다는 더욱 장려하는 것이 훨씬 국가경제에 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그렇다.

실용주의에 위배되는 조직 개편안
90년대 중반, 우리는 CDMA 개발을 중단할 뻔한 적이 있었다. 미국의 통상압력이 직접적인 원인이었고, 여기에 국내 정‧관‧기업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그 프로젝트는 마침내 사면초가에 몰렸고 종식을 기정사실화 하는 듯 했다. CDMA개발에 너나할 것 없이 힘을 보태던 도하 언론들도 약속이나 한 듯 프로젝트 중단을 당연시 하는 보도태도로 '언제든지 돌변하는 세태'를 그대로 보여줬다. 그 프로젝트 하나가 장관을 물러나게 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그러나 정통부는 거의 목숨을 걸고 그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목숨을 걸고'라는 표현이 과할지 모르지만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하면 적합한 표현이고도 남는다. 프로젝트의 중단은 곧 정통부의 존재가치를 말소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때 프로젝트가 중단됐다면 어땠을까? 그 당시 만일 정통부라는 독립조직이 없었다면 과연 그 프로젝트가 결국 성공을 거뒀을까? 여론을 선도하는 언론마저 등을 돌리는 판에 만일 산자부나 타 부처의 한 부서에서 그 프로젝트를 관장하고 있었다면? 또 다른 산업과의 딜은 없었을까?

이명박 정부가 실용주의 노선을 표명하고 나선 데는 대통령 당선인의 개인적인 성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경제살리기'라는 시급한 과제에서 비롯됐다고 보여진다. 국민이 압도적인 표차로 이명박 당선인을 선택하게 한 '경제살리기'를 가장 빨리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실용주의이기 때문이다. 인수위가 추진하고 있는 정부조직 축소 개편이라는 과제는 실용주의의 하위 개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책자들은 정통부의 해체가 상위개념인 실용주의 노선에 어긋나지나 않는지 먼저 검토해야 할 것이다.

정통부가 해야 할 일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알려진 바 인수위의 정부조직 개편안은 여론을 수렴한다거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공청하는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는 태도도 문제지만,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폐할 것인지에 대한, 그야말로 실용주의적인 정밀한 사전 분석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실용주의에 입각해서 보면 정통부는 보다 통합적이고 확대개편하는 쪽으로 무게를 두는 게 옳다.

정보통신 또는 IT를 하나의 산업으로 보거나, 아니면 기술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개 보는 시각에 따라 IT는 첨단 기술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일종의 산업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 바라보면 크게 왜곡되는 게 바로 IT의 특징이다. 그러한 시각은 극히 산업사회적인 것에 불과하다.

IT는 산업사회를 이어 세상을 송두리째 바꾼 새로운 패러다임 그 자체를 말한다. 물론 이러한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요소로 첨단기술이 존재하고 산업이 생성되었다. 그러나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다. 정보사회라는 거대한 세계를 견인해오고 있다. 혹시 착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아직 정보사회는 오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터넷이랄지 산업적 융복합화 같은 걸로 정보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선 기술 측면에서 보면 현행 IT는 '지렁이' 수준이다. 인간의 두뇌를 구현하는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앞에 두고 있을 뿐이다. 항차 세상사 모든 것이 다 소프트웨어일진대, 지금으로선 소프트 한국을 기약하기 힘든 실정이다. 우리는 IT융합을 말한다. 모든 산업으로 스며들어 IT는 없어진다는 무지한 소리가 간혹 나오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핵심이 IT이다. 그런데 융복합을 향한 그 IT가 실상을 들여다보면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다. 세계는 지금 그 융합을 선점하기 위한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IT와 결합하며 'IT한국'의 위상을 드높인 바 있는 통신 또한 마찬가지다. 와이브로로 세계 표준을 선점하고 휴대폰 수출로 세계 시장에서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하지만 향후 열릴 시장을 생각하면 아직은 어린애 땅따먹기 수준이다.

이것들은 앞으로 도래할 정보사회를 겨냥한 사전 경쟁의 한 장면들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국의 IT수준은 앞으로 정보사회에서 독립할 만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보사회는 우리에게 희망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 버겁고 버거운 도전이다. 자칫 경제적 주권은 물론이거니와 사회문화적인 종속을 종용당할 수 있다. 더군다나 정보사회 그 자체가 파생해낼 사생활 침해를 비롯한 각종 역기능들을 생각하면, 정보사회는 우리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정보사회는 한마디로 새로운 세계대전이다.

정보사회를 대비하는 일은 이처럼 산업사회적인, 낡은 시각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복합적 요소들로 얽혀 있다. 조금이라도 미래를 생각한다면 정통부 업무를 해체, 분산시키는 어리석은 일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정통부를 예컨대 '정보사회부'와 같은 보다 종합적인 부처로 개편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정보사회가 도래했을 때, 우리나라의 위치가 굳건한 반석 위에 놓여 있다면, 그때는 정통부를 해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정보사회란 세계대전을 앞두고 선봉부대를 없애서야 되겠는가.

식견있는 많은 국회원들과 새 정부의 경륜있는 정책자들이 정통부가 앞으로 해야 할, 절대 분산시켜서는 해낼 수 없는 중차대한 국가 대사를 역사적 소명의식으로 숙고해줄 것을 요청한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을수록 강이 풍부해진다. 댐에 넘실대는 물을 보고 산을 허문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정통부를 해체시키는 일은 이와 같이 거대한 산을 허물어 버리는 일과 같다. 사회 구석구석 스며들어 국가의 미래를 살찌울 IT라는 젖줄을 말라비틀어지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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